탁상 달력은 내 앞, 익숙한 자리에서 변함없이 자리를 지킨다.
내 시선과 마음은 달력의 숫자를 따라 흘러왔다.
손끝에 닿는 종이는 이제 마지막 한 장뿐이고,
그 마지막 장은 지금까지 따라온 시간을 조용히 뒤집는 순간을 품고 있다
연말이 다가올 때,
유난히 빠르게 사라지는 숫자들보다
이미 채워진 칸들이 먼저 나를 붙잡는다
같은 시각인데도,
계절이 바뀌면 빛의 기울기도 변하고,
그 기울기에 따라 마음이 반응하는 방식도 조금씩 달랐던 것 같다
봄의 빛은 가벼웠다.
아직 몸이 적응하기도 전에 먼저 나서
나를 부르는 듯이 스며들었다.
여름의 장엄한 빛은 하루를 길게 쓸어내며 단호한 선을 그었다.
그 밝음은 하루의 시간을 확장했고,
그 속에서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하루의 긴 속도에 맞춰 걸음을 조율했다.
가을의 빛은 마음을 달래는 쪽에 가까웠다.
조금 낮게 걸린 채, 멀어져 가는 빛을 안아주며
서두르지 말라 말했다.
그리고 겨울의 빛은 짧고 단단하다.
금방 사라질 것을 알기에
빛 한 줌 한 줌을 소중히 쥔 채
조용히 내어놓는다.
우리는 빛 아래서 하루를 보내지만,
정작 느끼는 것은 그 빛이 만들어낸
기울기의 감각일지도 모른다.
연말이 가까워지면,
달력도, 빛도, 하루의 길이도
서서히 기울어진다.
그 기울기가 나를 깊게 응시하게 만든다.
계획과 실천 사이에서 흘러간 시간들,
놓친 일들, 예상보다 잘 된 일들,
미처 이루지 못했지만, 올해 꼭 이루려 했던 희망들까지
오히려 계절의 기울기처럼
다음 해로 넘어가기 전 잠시 몸을 기대어 쉴 자리를 만들어준다.
그렇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잠시 몸을 맡기고 숨을 고른다.
이 겨울 아침, 낮게 내려앉은 빛은 조용히 내게 건네는 말이 되어 다가온다.
"오늘도 괜찮다."
달력의 숫자는 서서히 줄어들지만,
그 안에서 나는 오히려 마음을 채우는 법을 배운다.
아쉬움과 여유, 긴장과 이완,
서두름과 내려놓음 사이의 거리.
그 사이를 오가며,
해의 기울기가 알려주는 속도로
내 마음도 서서히 자리를 잡는다
그래서 나는 연말이 싫지 않다.
조용히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이 계절 빛의 기울기가
또 다른 시작을 준비시키기 때문이다.
내년의 달력은 아직 비어 있지만,
그 빈 공간이 내게 불안을 묻지는 않는다
아직 벗지 않은 껍질 속, 날것 그대로의 365일, 8,760시간이 숨어 있다.
흔들림 없는 희망과 불확실성이 뒤섞인 생명의 미묘한 진동으로,
가만히 숨죽이며 쓰임을 기다리는 시간들.
이 잠재된 시간이 바로 나의 미래임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