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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길고양이와의 만남 (1)

by omoiyaru

새벽 3시, 오늘 하루 종일 나를 신경 쓰이게 만든 존재, 이 시간에 글을 쓰게 만드는 존재가 있다.


몇 주전 집 앞에서 마주친 아기 길고양이이다.

이름 없이 떠도는, 엄마를 잃은 아기 길고양이.


나는 현재 고양이를 키우는 반려인이기도 하며, 길을 지날 때마다 고양이가 눈에 밟히는 애묘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현실'이라는 장벽을 뛰어넘을 수가 없다 보니 그저 그런 고양이들을 멀리서 바라보고 지켜보고 애틋하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감정을 갖지 않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아기 길고양이는 케이스가 달랐다.


하필이면 우리 아파트 바로 앞에 있는 분리수거하는 공간 옆에 자리를 잡고 이미 내가 발견하기 전부터 여러 사람들에게 밥을 얻어먹으며 생존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 이 고양이를 발견한 시점은 3~4개월쯤 되어 보였는데 전체적으로 건강해 보였지만, 어미를 잃어버린 상태는 분명했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먹이를 구할 방법이 없으니 분리수거실에 있는 스티로폼을 뜯어먹거나 사람들이 주는 걸 무엇이든 받아먹으며 버틴 것 같았다. (나중에 고양이에게 밥을 챙겨주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이미 2개월령 정도부터 홀로 아파트를 배회했고, 개사료를 주거나 과자를 주어도 잘 받아먹었다고 한다.)


나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내 머릿속에 이런 지론을 항상 안고 살아가고 있다.

'내가 이 세상의 모든 가엾은 생명체를 거두거나 챙길 순 없지만, 적어도 내 눈앞에 굶어가고 있는 생명체가 있다면 그때는 그 생명체를 거두어 주거나 그게 여의치 않다면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 주리라.'


애초에 내가 키우는 고양이 역시 위의 마음을 안고 살아가다 만나게 되었고, 그 마음을 실천하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 만약 내가 혼자 살고 있었더라면 이번에 만난 아기 길고양이도 어쩌면 큰 고민 없이 임보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져, 이제는 나에게 가정이 생겼고 특히나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어 약을 복용하며 고생하는 남편을 두고 독단적인 선택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차선책이었던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것으로 그 아이를 돌봐주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나는 그 아이를 발견한 날부터 몇 주간 매일같이 고양이사료와 물을 챙겨 그 아이가 배를 곪지 않도록 하였다. 임신 이후 컨디션이 좋지 않아 집에만 주로 있던 나에게 아기 길고양이는 매일 같이 나를 밖으로 나가게 만드는 이유가 되어주었다.


분명 우리 집에도 소중한 고양이가 있지만, 아기 고양이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왜인지 너무 각별했다.

처음에는 우리 집 고양이를 처음 데려왔을 때의 모습이 선명해서 그런가 싶었는데, 왜인지 모르게 나는 그 아기 길고양이의 상황에 과몰입해 있었다. 작디작은 생명체가 기댈 곳 없이 하루하루를 전전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애잔하게 다가왔다.


어느 날은 낯선 고양이로부터 밥자리를 습격받는 모습도, 매일같이 어두운 곳에 숨어만 있던 쫄보 아기 고양이가 어느 정도 사람들에게 신뢰를 쌓고 밖으로 나와 놀아달라는 것인지 함께 있어 달라는 것인지 사람들을 따라다니며 야옹야옹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모든 것이 짠했다. 점차 날씨가 추워질수록 혹시나 다음 날 내려가면 그 아이가 추위에 죽어있지는 않을까 겁이 나기도 했다.


그런 걱정 끝에 나는 잠시라도 편히 쉴 수 있는 박스집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너무 과한 것 같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그 당시의 나에게는 마음이 편한 일이었다.

박스집을 만들어 준 뒤에는 혹시라도 그것 때문에 해코지를 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추가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아파트 내에서 아기 고양이는 마스코트처럼 많은 아이들과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사람들은 산책을 하며 고양이를 보고 가고 각자의 방법으로 밥과 물을 챙겨주었고, 어린아이들은 학원을 오가며 고양이를 보고 가고 놀아주는 게 하나의 패턴이 되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잘 먹고 잘 크는 아기 고양이의 모습을 보며 덕분에 나도 삶의 활력을 찾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던 중 며칠 전부터 아기 길고양이가 영역을 확장하며 사람들 앞에 나오는 일이 잦아졌다.

이제는 5개월 정도가 된 크기였는데 사람들 앞에 나와서 소리를 내고 돌아다니다 보니 숨어 지내던 고양이를 알아보는 사람이 더 많아지게 되었다.


나는 한편으로 걱정이 되었다. 아파느 단지 내에는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모두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참 운이 좋은 아기 고양이이기에 그런 걱정은 뒤로 미루었다.


그렇게 나는 나대로 챙겨줄 수 있는 것을 챙겨주며 시간을 보내다 한편으로 걱정되는 부분이 생겼다.

이대로 사람들의 호의로 밥을 챙겨 먹으며 겨울을 지내다가 혹시라도 임신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하는 고민이었다. 나는 나의 신조대로 눈앞의 안타까운 생명체에게 선의를 베푼 일이었지만, 그것이 나아가서 더 큰 책임의 소재로 갈 경우 나의 행동은 그저 선의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나는 책임감이 없는 행동을 나의 욕심을 위해 지속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내가 전원주택에 살며, 내 사유지에서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있는 상황이었으면 말이 달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아이를 포획해서 중성화를 시켜주고 마당에서 키우면 될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파트의 화단에 살고 있는 고양이이기에 내가 그 아이를 챙겨주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피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굶어가는 생명체를 보고 그냥 모른 체 하는 것이 맞는 일이었을까.

그 무엇도 정답이라 할 수 없는 명제에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러면서 아기 길고양이가 조금 더 크게 되면 영역을 확장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스스로 사냥을 할 수 있게 되면 이곳을 알아서 떠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불편한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나를 위한 답을 스스로 내린 것이었을 뿐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나는 이날 처음으로 고양이에게 밥을 주면서 처음으로 그 아이에게 계속해서 밥을 주는 것이 맞는 행위인지를 고민했었다.


그 마음이 혹시라도 닿은 것일까?


그다음 날 나는 또다시 밥을 주러 내려갔었다. 일정이 있어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내려갔는데 아기 고양이가 보이지 않았다. 원래 길고양이들은 밥을 주는 사람을 기억하고 있기에 비슷한 시간대에 늘 기다리고 있는 패턴이 있다. 이날은 다른 밥들도 보이지 않는데 고양이가 보이지 않아 뭔가 싸한 느낌을 받았는데 설마? 하는 마음으로 평소대로 밥을 주고 올라갔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어서 또다시 밥을 챙겨 내려간 자리를 보니 밥을 다 비워져 있었지만, 아기 길고양이는 똑같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몰라 평상시 늘 자리를 지키던 시간대에 맞춰 나갔었지만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고, 2시간 뒤에 다시 내려가 보았을 때에도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챙겨준 밥도 그대로였다.


갑자기 심장이 뛰기 시작하고, 마음이 뒤숭숭했다.

한동안 주체할 수 없는 감정들로 인해 정처 없이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처음으로 떠오른 생각은 '잘못된 거 아닐까?' 하는 질문이었다.


혹시나 내가 그 전날 밥을 주는 게 맞는 행위인지 고민한 것이 원인이었을까? 그 무거운 마음이 어린 고양이에게도 전달된 건 아닐까? 하는 과도한 자책감까지 밀려들어왔다. 이유를 알 수가 없으니 더욱 싱숭생숭했다.


그리고 고양이가 영역을 확장해서 조금 있다가 돌아오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다시 나가 보았을 때에도 보이지 않는 모습에 마음이 쿵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마음이 좋지 않아 벤치에 앉아서 계속해서 그곳을 응시하고 있는데 어린 여자아이가 나처럼 고양이를 보러 왔다가 고양이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그냥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모두의 관심을 받던 아기 고양이. 지금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슬프면서도 걱정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밥이 사라지긴 했으니 어딘가에 잘 있을 거라는 복합적인 생각과 감정들이 나를 지배했다. 무엇보다 마지막 인사도 못하고 영영 못 보게 된 것 같아 그 부분이 슬프게 다가왔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렇게 슬퍼만 하기에는 결과적으로 나는 책임질 수 없는 생명체였기에 그것이 어떤 이별의 모습이든 이대로 보내주는 것이 맞다는 결론은 부정할 수가 없는 현실이었다.


오히려 그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면, 그동안 모두가 잘 먹여서 어딘가로 떠나갈 수 있을 만큼 아기 고양이가 잘 컸다는 것이기에 다행이라 여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머리로는 그렇게 이해를 했지만, 집에 들어와서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느낌이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아파트 단체 톡방에서 누군가 고양이 이야기를 며칠 전 올린 것을 보게 되었다. 거기에는 우리가 밥을 주던 어린 고양이 사진과 함께 키우려고 데려가려고 하다가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단톡방이기에 더 이상의 아기 고양이의 언급은 없었지만, 내일까지 아기 고양이가 그 자리에 보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고양이를 데려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동안 밥을 주며 사용했던 밥그릇, 물그릇을 정리하고 올 생각이다.


몇 주동안 나의 무료한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준 아기 고양이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하며, 행복하기를 간절하게 기도해 본다.


그리고 이번 일로 인하여, 힘들고 복잡한 심경의 나를 지켜주는 존재. 늘 내 곁에 존재하며 평온한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우리 집 고양이의 소중함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요 몇 주간 아기 고양이를 챙기는 것도 그렇고 시험공부를 하느라 우리 집 고양이에게 소홀해졌었다. 2살이 넘은 우리 집 고양이는 이제 어린 시절처럼 장난감에 반응하지 않다 보니 점점 놀이활동이 줄어들어 거의 하루 종일 잠을 자기도 하는데, 그렇다 보니 나도 고양이와 함께 노는 시간이 줄어들고 그게 당연해져 가는 시기였다.


그래서인지 주는 대로 잘 먹고 장난감에 반응하는 초롱초롱한 눈빛의 아기 고양이에게 더욱 정이 갔던 것도 사실인 것 같다. (사람들이 둘째를 갖는 이유를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오랜만에 나를 필요로 하는 존재를 눈앞에 두고 그 존재를 챙기며 많은 감정들을 느끼고 에너지를 쏟아부었던 몇 주였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 존재가 사라진 지금, 복합적인 감정들로 인해 잠시 힘들기도 했지만 덤덤히 현실을 받아들이고 지금은 그 아기 고양이의 축복만을 바래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직 어린아이와도 같은 연약한 마음이 내 안에 가득하다는 것을 오늘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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