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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Nov 19. 2024

시간의 굴레속에서 꿈꾸는 삶

로멘틱 코미디의 시초라 불리는 영화 <사랑의 블랙홀>을 인상 깊에 본 적이 있다.      


주인공 필 카즈너는 기상캐스터로 매사에 불만과 투덜거림이 가득하며 동료들에게도 그리 평판이 좋지 않다. 그는 성촉절 취재를 위해 작은 마을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기묘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처음엔 혼란스러워하던 필은 점차 이 상황을 즐기기 시작한다. 짖굳거나 도를 넘은 장난을 치며 일탈을 거듭한다. 하지만 이러한 일탈도 잠시, 내일이 오지 않는다는 절망에 빠져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동료 리타와의 관계를 통해 반복되는 삶에 조금씩 변화를 주게 된다. 마을 사람들을 돕거나, 피아노나 문학에도 정진해 멋진 피아노곡도 연주할 수 있게 된다. 반복되는 하루속에서도 자신을 채워나가며 성숙해진 것이다.      


가끔은 필 처럼 반복되는 하루를 살수 있다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특히 휴일 저녁이 그러하다. 직장인에게 가장 두려운 순간이 있다면 아마도 일요일 저녁일 것이다. 이때만 되면 시간이 멈췄으면,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싶다.      


만일 필처럼 시간이 반복되는 상황에 직면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처음엔 분명히 혼란스럽고 두려울 것이다. 내일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내 하고 싶었던 일을 잔뜩해보거나, 평소에 하지 못했던 일탈을 즐기게 될지도 모른다. 무얼해도 같은 시간이 반복된다면 그 무엇도 가능할테니 말이다.      


주말이 다가오면 이런저런 계획을 세워보지만, 막상 주말 아침만 되면 피로에 지쳐 아무것도 하기 싫어질때가 많다. 저녁이 되면 무의미하게 보낸 하루를 자책하며 후회하지만, 달리 도리가 없다. 이럴 때 오늘이 반복된다면 주어진 하루를 마음껏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하지만 무한히 같은 시간이 반복되기만 한다면, 그것은 곧 ‘저주’가 되고 말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 버티기 어렵기 때문이다.      


웹툰 <오늘만 사는 기사>의 주인공은 죽을때마다 하루 전으로 되돌아간다. 죽지 않고 하루를 무사히 넘겨야만 내일을 맞이할 수 있다. 언뜻보면 이는 축복 같지만, 그는 전장에서 용병으로 살아가며 끊임없는 죽음의 위기에 놓인다. 그는 수많은 죽음을 겪어야만 내일을 맞이할 수 있다.      


이 웹툰의 댓글에는 주인공의 정신력에 대한 칭송이 가득하다. 수많은 죽음을 경험하면서도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정신이 붕괴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온전한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매일 죽어야 한다면 그것만큼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을까.      


또 다른 웹툰 <용사가 돌아왔다>에는 회귀하는 용사가 등장한다. 그는 죽을때마다 과거로 되돌아 가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 능력으로 악을 처단하고 사랑하는 이와 결혼해 행복한 삶을 살다가 임종을 맞이하지만, 자신의 능력 때문에 다시 과거로 되돌아가게 된다. 몇 번이나 삶을 반복해도 다시 과거로 되돌아 갔고, 자신이 영겁의 시간에 갇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절망하게 된다. 그러자 그는 업겁의 저주에서 벗어나 영원한 안식을 맞기 위해 모든 것을 계획하고 꾸미는 흑막이 된다.      


무한히 같은 시간이 반복된다면 그것은 곧 악몽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나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인간관계 역시 단절에 직면한다. 하루동안 쌓은 우정과 사랑도 모두 물거품에 지나고 말 것기에 지속성이 사라진다. 시간의 연속성이 사라지면 내 삶도 의미를 잃고 만다.       


영원한 시간의 굴레에 갇히게 된다면 무료함과 권태뿐아니라 긴 외로움에 지쳐버릴 것이다. 사람은 결코 혼자서는 살아 갈 수 없다. 나의 시간은 무한히 반복되지만, 타인의 시간은 그렇지 않기에, 결국 나는 무한한 외로움과 우울함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하루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지만, 그 소중함은 금세 잊히고 만다. 무의미한 하루를 보내는 일이 반복되곤 하니 말이다.     


때론 직장인의 삶이야말로 필이 갇힌 시간의 굴레와 같은 느낌을 받을때가 있다. 하루의 대부분을 직장에서 보내지만, 직장에서는 다채로움이라고는 눈꼽 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반복되는 일과 업무속에서 생동감 넘치는 삶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빈복되는 일상에 빠져들다보면 하루가 참 무의미하게 느껴질때가 많다. 그러니 평일에는 시간이 빨리 가기만을 바라다가도 주말이나 휴일에는 시간이 가질 않길 바라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월요일 아침이면 ‘월요병 이겨냅시다.’, ‘힘냅시다.’, 파이팅!’ 같은 메시지가 자주 보인다. 그럴때면 그냥 힘내지 않고 재미있고 보람찬 하루를 살아갈 순 없을까 싶다.      


직장인에게 있어 가장 큰 꿈이라면 ‘저녁이 있는 삶’ 이나 ‘경제적 자유’ 일 것이다. 야근에 시달리다보면 저녁이 있는 삶이 절실해진다. 하루 중 겨우 한 두시간의 여유에 만족해야 한다면, 사는게 참 헛헛해질때가 많다.      

필처럼 무한한 하루를 맞이하지 않는 이상, 직장인의 삶을 벗어던지기도, 새로운 선택을 하기도 어렵다. 모든 것은 자기 하기 나름이란 사실을 잘 알면서도 막상 실행에 옮기기란 참 어렵다. 그래서 직장인의 삶은 늘 애환이 가득하고 지루함, 우울으로 가득하게 된다.      


오늘 내가 살아가는 시간은 어제 죽은 누군가가 그토록 바라던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시간의 소중함은 늘 망각하기 쉽다.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필멸자의 삶을 칭송하지만, 필멸의 삶도 불멸 못지 않은 권태가 가득하니 말이다.     


과거에는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전쟁이 가득했고, 노동자의 삶도 비참함이 가득했다. 그렇다면 내일을 꿈구기보다 당장 굶어죽지 않는 삶에 초점이 맞춰졌을 것이다. 현대는 과거와 같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나 혼란이 거의 없고, 온전히 내일을 꿈꾸며 살아갈 수 있다. 다채롭고 생동감 넘치는 삶을 살아갈수 있지만, 어쩐지 일상에 찌들어 무료하고 권태로운 삶을 살아가는게 아닌가 싶다. 좀 더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고 싶지만, 무얼해야 의미있고 다채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럴때면 시간의 마법을 경험해보고 싶다.  


시간은 참으로 묘한 존재다. 우리 사는 세계에서의 시간은 절대적인 존재지만, 우주속에서는 결코 절대적인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적인 시간만이 존재할뿐이다. 하지만 우주가 아닌 좁은 세계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간만큼 절대적인 것이 없다.       


절대적인 시간에 짓눌리다보면 시간을 허망하게 흘려보내기 일쑤다. 열정으로 가득차서 잘박함이 가득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 하루의 소중함을 만끽하며 다채로운 나날을 보내고 싶다. 직장인의 삶이 아닌 내가 나로서 살아가고 싶다. 그려러면 나를 둘러싼 굴레의 삶을 벗어나는 일이 우선일테다.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온전히 내가 나로 살아가기 위한 나만의 삶 말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는 시다. 시인의 시와 같이 뜨거운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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