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der the sea 10
[용왕교]
-용왕님의 부르심을 받든 대왕오징어님께서 마침내 용왕교를 창시하시나니, 혼란과 도탄에 빠진 물살이들은 모두 [용왕님 가라사대]로 모이라. 네 너희들을 배곯지 않게 하리라.
[용왕님 가라사대]는 신화 속에서 잠들어 있던 용왕님을 수면 위로 드러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물살이들과 메신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용왕교 창시 이후 커뮤니티 게시판의 회원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에 반비례해 대왕문어를 추모하는 움직임은 갈수록 더뎌졌다.
용왕교 창시 아래 대왕오징어의 첫 공식 연설이 있던 날, 물살이들은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난파선 가장자리에는 ∿문양의 미역이 원 형태로 빙 둘러졌는데 이는 용왕교를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흑명태는 난파선의 끝과 끝을 오가며 혹여 누군가 신성함을 짓밟는 우를 범하진 않는지 예의주시했다. 이윽고 강력한 물살과 함께 솟아오른 대왕오징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난파선 아래에선 우레와 같은 지느러미 마찰 소리가 떠나갈 듯이 울려 퍼졌다.
“여러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뭔 줄 압니까? 바로 ‘식’입니다. 세상에 먹는 것만큼 절박한 것도 없습니다. 용왕교는 모두가 배곯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 보일 겁니다. 이제부터 매일 아침 각자 서식처 주변에서 먹이 줍기를 한 뒤 먹이저장고에 바치도록 하십시오. 식사 시간이 되면 자신의 몸무게에 비례해 먹이를 배급하도록 하겠습니다. 과식, 편식 이런 것은 이제 청산해야 합니다. 누군가 과식을 하면 누군가는 굶주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또한 편식은 영양의 불균형을 초래하여 건강을 해칩니다. 모두가 적당한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해야 한다 이 말입니다. 앞으로 할당받은 먹이 외에 군것질이나 간식을 먹는 행위가 적발될 경우 다음 날 그만큼의 먹이를 제할 것입니다. 운 좋게 들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용왕님께선 다 굽어 살피고 계신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하십시오.”
예상치 못한 연설 내용에 물살이들이 하나둘씩 술렁이기 시작했다. 멀찍이서 보고 있던 흰 수염고래의 수염 역시 가느다랗게 흔들렸다.
“‘식’ 다음으로 중요한 게 뭡니까? 바로 ‘동’입니다. 먹었으면 그만큼 움직여줘야 합니다. 인간계에도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건강하게 장수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소망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앞으로 이 해역에 산책로를 건설할 계획입니다. 식사를 마친 물살이들은 매일 산책로 공사 현장으로 가서 물길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부지런히 구슬땀을 흘려야 저녁에 배급될 먹이도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참고로 저녁은 점심보다 적은 양이 할당될 겁니다. 적당한 먹이와 적당한 움직임이 몸에 배어 모두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해지는 그날까지- 용왕교라는 두터운 공동체 속에서- 함께 나아가도록 합시다. 그럼 이것으로 용왕님의 교리 전달을 마치겠습니다.”
연설이 끝나자 대왕오징어의 극성팬들이 앞 다투어 몰려왔다.
“제 배 한 번만 문질러주세요.”
“저는 대가리요.”
여기저기서 ‘용왕교 만세’, ‘대왕오징어님 만세’, ‘문질력 만세’라는 구호가 튀어나왔다. 먼발치에서 보고 있던 개복치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그러나 대형잠수함을 연상시킬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의 몸집 때문에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복치 의원님. 잠깐만요.”
개복치는 예의 정갈한 웃음을 지으며 돌아보았다. 꼬리지느러미가 없는 몸통은 자라다 만 것처럼 방정맞은 느낌을 주기도 했지만 그 뭉뚝한 반 토막이 자그마치 1000킬로가 넘었기 때문에 진중함이 느껴지기도 하는, 상반된 느낌을 동시에 자아내는 개복치 의원이었다.
사실 그는 자신의 종이 지니는 특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로부터 개복치는 몸을 사리는 경향이 강해 덩칫값을 못 한다는 꼬리표가 따라붙었었다. 그의 동족들 대부분이 아침햇살의 강렬함에 놀라 죽거나, 점프를 하다 수면에 부딪친 통증으로 인해 죽거나, 일광욕을 하다 만난 갈매기 때문에 스트레스받아 죽거나, 바닷속 공기방울이 눈에 들어오는 바람에 돌연사하거나 했다. 그러나 개복치의원은 그런 이유로 죽지 않았다. 그가 질병을 고치는 의원이 된 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선 지도 몰랐다.
장수거북은 그가 대왕문어님 통치 시절, 갯바위구를 종종 오갔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참에 그의 속을 슬쩍 떠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정갈한 웃음 앞에서 머릿속이 무장 해제되는 것을 느꼈다.
“아아, 인간계를 용케 탈출하신 장수거북님 아니십니까.”
“그저 운이 좋았습니다. 헌데... 의원님은 대왕문어님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개복치는 예전에 문어숙회라는 제목이 달린 영상을 구 휴대기기로 본 적이 있었다. 넓적한 접시 위에 잘게 썰린 문어가 꽃장식과 함께 펼쳐져 있었다. 그것들은 인간들의 식도를 타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때 함께 본 물살이들은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더러는 오줌을 질질 싸기도 했다. 하지만 개복치는 인간이 입가로 줄줄 흘리는 타액을 끝까지 지켜보았었다.
“그분께서 어떤 역경과 고난도 헤치고서 우리 곁에 나타나길 간절히 바랍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다 한들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수거북은 개복치 의원이 자신의 질문을 살짝 비켜섰다고 느꼈다. 그것이 고의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용왕님 가라사대]엔 투표 결과가 올라왔다. 대왕의 임기는 ‘1년’이 가장 많은 찬성표를 받아 채택되었으며 연임은 인간계처럼 한 번만 할 수 있단 내용이었다. 또한 [용왕님 가라사대]의 메인 화면이 ‘난파선당’이란 커다란 네 음절로 교체되었다. 비슷한 시기 [고래의 꿈]의 메인 화면 역시 ‘갯바위당’이란 네 음절로 꽉 들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