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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어풍차 Dec 17. 2020

무법자가 된 교수님

-어느 겨울날에 일어난 이야기-

아침부터 간간이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코로나 때문에 망설이고 망설이다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경기도 있는 예식장으로 향했다. 그곳은 초행길이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리는 여유 있게  출발을 했다.


"경로를 이탈하셨습니다. 다시 검색합니다."

" 어어, 잠깐 사이에 놓쳤다. 저기서 좌회전했어야 하는데"

하며 멋쩍은 듯 남편이 힐끔 나를 쳐다본다. 옆 자석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고 있던 나는 조금 돌아가지 뭐 하며 여유를 부린다.


" 어디서 유턴하면 되는지, 지도 좀 잘 봐봐. 아니, 여기가  아니잖아. 벌써 몇 번째야, 지도 하나도 똑바로 못 봐. 으이그, 이 답답아"

"그래, 답답이 데리고 사시느라 엄청 고생이 많으시네요. 그러면 이 답답이는 이만 물러갑니다. 똑똑한 당신이 지도 보고 잘 갔다 오시지. 나,  안가, 여기서 내려줘."

지도를 보며 티격태격 싸웠던 옛날 일이 떠올라 히죽 웃음이 나왔다.


간간이 내리던 눈발이 굵어지고 있었다. 외곽으로 들어서자 눈은 도로를 하얗게 지우고 있다.  문득 오래전에 서울에서 교수님을 모시고 부천으로 가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도 오늘처럼 눈이 내렸다.


"00 씨, 서울 지리 잘 모를 텐데. 괜찮겠어?"

같이 행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의심 반 걱정 반으로 나를 쳐다본다. 차에 길을 안내해 주는 내비게이션이 있을 테니 염려하지 말라며 나는 서울로 향했다. 모처럼 만에 서울 외출이었다. 출근길을 비껴간 전철 안은 비교적 한산했다. 차창밖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눈은 풍경들을 하나씩 지우고는 또 다른 풍경을 연출했다. 눈 때문인지 아니면 오늘 열릴 강의 때문인지 나는 약간 들떠 있었다.

전철에서 내려 교수님이 수업하고 계신 강의실로 찾아갔다. 그곳에는 미리 연락을 받은 관계자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수님이 지금 강의 중이라서. 곧 끝날 거예요. 안으로 들어가 강의 들으실래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 뒷좌석에 앉아 강의를 들었다. 강의 주제가 문학이라 꽤 재밌고 흥미로웠다. 강의가 거의 종반을 향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여러분,  저 뒤에 앉아 계신 분 좀 봐주시겠어요? 예쁜 미인이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부천에서 문학 강의가 있거든요. 멀리서 나를 데리러 와주신 저분께 박수 한번 쳐 줄래요."

그렇게 훈훈하게 강의를 끝내고 교수님과 교수님 제자인듯한 분과 함께 부천으로 향했다.

그런데 서울시내를 벗어나자  교수님은 길을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여기서부터 어디로 가지? 자네가 길을 안내해 줘야지. 나는 거기 가는 길을 잘 몰라요. 그래서 길 잘 아는 사람을 부탁했던 거야."


아뿔싸, 나를 오게 했던 목적을 그제야 정확히 인지한 나는 그때부터 머릿속이 하해 지기 시작했다. 나는 자타가 공인한 길치, 음치, 박치였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차 안에는 내가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길을 안내해 주는 내비게이션 초차도 없었다. 지금은 누구나 스마트폰이 있어 검색을 하면 금방 찾을 수 있지만 그 당시는 아직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이전이었다.


" 어! 이정표를 보니까 이쪽으로 가야겠는걸, 아니야 이쪽으로 가야겠어."

길눈이 깜깜한 세 사람은 서서히  도로 위의 무법자가 되기 시작했다. 뒤에서는 차들이 빵빵거리며 경고를 보냈고 창문을 열고 욕설을 하는 운전자도 있었다.


뒷좌석에서 앉아 있던 나는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고 등에서는 미안함과 죄송스러움 때문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얼마를 헤맸을까 서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차는 광명시로 와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정신없이 생각하고 있는데 순간 구세주처럼  눈앞에 부천시 택시가 보였다.


"교수님! 제가 택시를 타고 앞에서  천천히 안내할 테니 택시를  따라오십시오."

그렇게 우리는 약속시간이  훌쩍 넘긴 시간에 강의할 장소에 도착했지만 양해를 해준 문우들 덕분에 무사히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우연히  신문에 실린 그 교수님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교수님, 잘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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