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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로맨티시스트라는 사람

내 마흔세 번째 생일

by 혜연

2024년 5월 4일 토요일

학점은행제로 듣는 한국어 교원 2급 과정의 실시간 화상 세미나에 참여하느라 새벽 2시 반부터 아침 6시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잠도 거의 못 자고 오전에 출근을 했는데 이 날 또 가게는 역대급으로 바빠버리네...

우리 사장님 SK는 아주버님의 결혼식이 있어서 일찍 가야만 했고 나와 동생 M 단 둘이서 우리 가게 역대 매출을 올렸다. M은 먼저 퇴근했고 나는 가게 청소까지 끝낸 후에 시장을 나서며 버거씨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버거씨가 다짜고짜 뒤를 돌아보라고 했다. 휙 고개를 돌려보니 길 맞은편 서점 앞에서 버거씨가 팔을 흔들고 있는 게 아닌가!? 내 생일을 축하해 주러 올 거라더니 오늘따라 옷도 멋지게 차려입은 남자가 환한 얼굴로 달려와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어제 잠도 못 자고 오늘 일도 엄청 힘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방금 출근한 것처럼 완벽한 모습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버거씨의 너스레였다. 사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이날 아드레날린이 제대로 폭발했었다. 잠을 거의 못 잤음에도 일하는 동안 너무 바빠서 피곤한지도 몰랐고 배도 안고팠다. 준비한 음식이 떨어질 때마다 나는 손님을 돌려보내는 대신 에너자이저처럼 밥을 또 하고 또 하고 야채도 새로 볶으며 손님들을 거의 놓치지 않고 다 받아냈다. 그런데 버거씨를 보니 뒤늦게 긴장이 탁 풀리네. 긴 두 팔에 꽤 오래 파묻혀서 숨을 돌리며 충전을 받았다. 허그 참 좋다...

집에 가서 예쁜 옷으로 차려입고서 버거씨 손을 잡고 그가 미리 예약해 놨다는 레스토랑을 향해 걸어갔다. SK가 준 검정 드레스를 입고 굽이 높은 앵클부츠를 신었는데 스스로도 꽤 예쁘게 느껴졌다. 자꾸만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흘끔흘끔 보게 되네. 이런 자신감 얼마만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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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늘어선 테라스에는 주말 저녁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시끌벅적하게 붐비고 있었다. 한동안 나와는 상관없는 풍경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지금 그 풍경 한복판에서 멋진 중년남자의 손을 잡고 폼나게 걷고 있었다. 정말 한 치 앞도 모를 인생이구나.

우리가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때 손님이 아무도 없어서 내가 이렇게 농담을 했다.

"어머! 레스토랑을 통째로 예약할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내 말에 버거씨는 어버버 하며 대답할 말을 찾질 못했고 여직원이 그 모습을 보며 나와 함께 웃었다.

하지만 이내 손님들이 들이닥치더니 순식간에 레스토랑이 꽉 찼다. 여기 꽤 유명한 집인가 봐... (나중에 나올 때 보니 입구에 미슐랭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샴페인을 마시다 말고 버거씨가 생일선물을 내밀었다. 목걸이었다. 생일케이크랑 생일노래만 불러주면 된다고 했건만 고급레스토랑에 선물까지 준비를 하다니...
내가 너무 심하게 감동받은 표정을 했더니 버거씨가 오히려 몸 둘 바를 몰라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생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버거씨가 생일축하노래를 부르는 동영상을 보내준 걸 보고도 펑펑 울었다. 누운 채로 울면서 그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봤는지 모른다.

"고작 이런 걸로 이렇게까지 크게 감동하니 내가 더 당황스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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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기 아까울 만큼 예쁜 전채요리, 흑임자 샐러드와 김치를 곁들인 연어스테이크로 식사를 끝낸 후 후식이 나왔다.

버거씨가 미리 직원에게 부탁을 했던지 생일초가 꽂혀있었다.
감동이긴 한데... 숫자는 꼭 저렇게 크게 써야만 했나요...

생일노래를 또 불러줄 기세여서 내가 말렸다. 여긴 그런 분위기 아닌 것 같아. 동영상으로 수십 번 불러줬잖아. 아 한번 불렀겠지만 난 그걸 수십 번 돌려 봤거든...

버거씨는 스스로를 로멘티스트라고 말한다. 작은 것에도 크게 감동하는 나에게 앞으로 보여줄 게 너무 많고 데려가고 싶은 곳 함께 공유하고 싶은 것들이 정말 많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나는 그저 고맙다는 말을 하고 또 했다.

내가 가장 힘든 시기에 손을 내밀어줘서 고맙고 설렘을 느끼게 해 주어서 고맙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인 것처럼 대해줘서 고맙다고.

여러모로 뭉클했던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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