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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먼지 Jan 30. 2023

소멸에의 숙명을 지닌 사람들

「환상의 빛」 / 「인간실격」 / 「상실의 시대」를 보고읽고

총체적 종언이라는 점에서, 죽음은 본질이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본질이라는 말을 갖다 붙일게 하나 없는 생에서, 유일무이한 근원적 사건.


그래서 그들은 그토록 필연적이게 소멸로 다가섰는지도 모른다.


이 글에는 세 개의 죽음이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츠 감독의 데뷔작, 「환상의 빛」의 이쿠오의 자살.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의 자살. 무라카미 하루키「상실의 시대」 속 가츠키의 자살.


세 죽음의 외양은 모두 자살이다. 그러나 그것은 목격자의 비명과 엠뷸런스 소음으로 떠들썩한 가십이 아니고, 그 어떤 정치적 목소리를 위해 화염 속에 휘감긴 장렬한 산화도 아니며, 암묵 속에서 하나의 의식처럼 행해진 '사라짐'이다.


선로 위를 걷다 기차에 치인 이쿠오는 죽기 직전까지 단골 바(bar)에서 커피를 마셨고, 다자이는 유복한 집안에서 부족함 없이 살았으며, 가츠키 역시 그랬다.


생을 서둘러 종결할 이렇다 할 이유가 없음에도 그들은 매일 아침 집을 나서듯 죽음으로 다가섰다. 주어진 과업을 묵묵히 수행하겠다는 듯.



ⓒ 고레에다 히로카츠, 「환상의 빛」



애초에 그들의 죽음에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면 상기 언급한 세 개의 걸출한 세계(이야기)는 탄생할 수 없다. '합리적인' 죽음은 표현될 수 없고, 다만 기록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저널리즘의 영역이요, 문학이나 영화와는 무관한 것이다.


엄밀히 말해 세 명의 죽음은 자살(殺)이라기보단 소멸이다. 스스로를 해하려는 다분히 적극적인 의도에서 행해진 의지적 행위가 아니고, 바다모래 속에 제 몸을 묻고 껍질 속으로 파고들어 소리 없이 썩어 문드러지는 갑각류의 그것에 가까운 셈이다.


별다른 의도가 없다는 점에서, 남겨진 주변 인물들은 나름대로 괴롭다. 유미코(환상의 빛)는 시종일관 "그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되뇌며, 나오코(상실의 시대)는 끝끝내 가츠키가 만든 공허와 상실을 극복하지 못했다. 다자이는.. 모두 알다시피.


존재는 질량을 가지고, 따라서 떠난 존재는 일정한 공백을 남긴다. 남은 자들 속에.


「환상의 빛」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숨 막히는 풍경들을 병렬함으로, 그것으로 내러티브를 대신함으로- 무섭게 도사린 이면의 어둠과 구멍을 말했고, 「상실의 시대」는 두 개의 잇따른 죽음 사이의 간격을 온통 혼란한 활자 / 내면으로 메우며 상실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들 작품(또는 인생) 전체에 체취처럼 스며있는 퀴퀴한 허무와 상실보다 더 인상 깊은 건, (적어도 나에겐) 떠난 자들의 표정이었다.


죽음과 친연한 감각- 이를테면 절망, 우울, 분노- 의 낌새가 전혀 없는 무심하고 일상적인 표정. 차갑고 축축한 절정으로 다가서는 필연적인 표정. 남겨진 이들에게 영원한 구멍으로 남을 그것들.


그래서.. 그들은 잘못했는가?


친절과 다정을 폭력으로서 강요하는 오늘날, 긍정과잉의 시대에서 스스로 선택한 죽음조차도 죄다. 하지만 기실 이들에겐 잘못이 없다. 이쿠오는, 가츠키는, 다자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주춤주춤 걸었을 뿐이다.


다가오는 한랭전선이니 북상하는 오호츠크해기단 같이 덮쳐오는 숙명 앞에 눈을 감았을 따름이다.


그것이 어째서 죄가 될 수 있을지.



ⓒ고레에다 히로카츠, 「환상의 빛」



유미코는 묻는다.


"난 정말 모르겠어. 그 사람이 왜 철로를 걷고 있었는지 (...) 그 사람이 왜 그랬을 것 같아?"


타미오는 답한다.


"바다가 부르는 것 같았대. 아버지가. 전에는 배를 탔었는데, 홀로 바다 위에 있으면 저 멀리 아름다운 빛이 보였대. 반짝반짝 빛나면서 아버지를 끌어당겼대.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타미오는 핵심을 짚었다.


누구든 바다 위에 홀로 남는 순간, '그때'에 '그곳'이 덩그러니 주어진 순간, 성막(聖幕)처럼 펼쳐지는 환상의 빛은 비로소 임재한다. 그렇다면 별 수 없다. 절정에서 문득 추락하는 동백*처럼 소멸하는 수밖에.


생명은 예외다. 죽음은 숙명이다. 그러니, 부디 평안하라.






* 김훈,「자전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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