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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먼지 Apr 30. 2023

쉬운 글이 좋은 글이라는 말에 대하여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 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


영화 평론가 이동진 씨는 영화「기생충」에 대해 이렇게 한줄평을 남겼다. 그리고 그는 이 문장으로 인해 때 아닌 구설수에 오르게 되는데, 소위 '명징직조' 논란이라고. 들어는 봤는지?


'명징직조' 논란의 핵심을 요약하자면 이것이다.


'왜 말을 그렇게 어렵게 하느냐? 뭔가 있어 보이려고 괜히 그러는 것 아니냐. 쉬운 글이 좋은 글이다. 너희 평론가 족속들!'


사실 이 '명징직조' 논란의 출연은 비단 이동진 씨의 글에서만 촉발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려운 글'에 대한 일반 대중의 반감이 이미 상당한 수위에서 찰랑거리고 있던 차에 '명징'과 '직조'가 똑하고 떨어져 표면장력을 부숴버린 것이라 보는 게 더 합당할 것이다.


해당 문장을 이루는 단어들이 정말 그렇게까지 비일상적이고 전문적인, 그러니까 '어려운' 어휘냐는 의문을 차치한다면, 명직논란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바로 사태의 성격이다.


독자가 보기에 읽을만한 가치가 없는 글이라면 안 읽으면 그만일진대, 굳이 왜 분노를 터뜨리며 더 나아가 시간과 노력을 들여 공격을 펼치냐는 것이다. '그것이 인터넷/SNS 시대의 특징'이라며 넘어가기엔 이 현상이 함의하고 있는 바는 너무 중요해 보인다.


우선 짚어봐야 할 점은 '괜히 있어 보이려고 굳이 어려운 말을 쓴다'는 논거의 취약성이다. 엄밀한 의미로 세상에 완벽한 동의어는 없다.


쓸모가 상당 부분 겹치는 어휘들은 여럿 있겠지만, 상용되는 언어에는 각자 구분되는 나름의 의미범위와 뉘앙스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세월 진행된 언어의 진화 속에서 흡수와 소멸을 피해 살아남은 것이다.


일례로 [명징][직조]를 살펴보자. 비슷한 의미의 '쉬운 단어'라고 하면 [분명히] / [(직물 따위를) 짜다] 정도가 있겠다. 그럼, 언어를 순화해서 '상승과 하강으로 분명하게 짜낸..계급 우화'라고 하면 의미의 누수가 없이 작가의 의도대로 출력된 문장일까?


당연히 아니다. [분명하게]와 [명징하게]는 우선 다르다. 전자는 후자보다 이미지적이고 2차원적인데 반해 후자는 촉각적이다. 예를 들어 메스(mes)는 명징하지 분명하지 않다.


[짜다]와 [직조하다] 역시 마찬가지다. 후자는 전자보다 구조적인, 말하자면 물성(物性)을 지녔다. [짜다]가 좀 더 행위에 중점이 있다면 후자는 사물에 중점이 있다.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나름의 정념과 사고는 [분명] 하지 않고 [명징] 했던 셈이다.


'쉬운 글이 좋은 글'이라는 주장이 맞는 말이 되려면, 필수적인 조건이 하나 붙어야 된다. '목적에 부합하는 선'에서 쉬운 글이 좋은 글이지, 지면의 목적과 작가의 의도에 달하지 못하는 이상 뭐가 어떻든 무의미한 글이다. [분명히]/[짜다] 같은 단어는 의미범위상 목적에 부합하지 않았을 뿐이다.


명직논란과 비슷한 사태가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지는 곳이 철학 텍스트들이다. 철학 텍스트의 경우 터무니없이 난해한 어휘와 논리구조가 일상처럼 난무하곤 하는데, 이에 대한 대개의 비난 역시 글의 목적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왜 글을 이렇게 못 알아먹게 쓰느냐. 알아먹으라고 쓴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저히 해석의 여지조차 보이지 않는 텍스트 앞에 '나'는 보통 예상독자가 아니다. 욕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그런 텍스트들은 최대한 정확하고 누수 없는 의미 전달을 위해 씌인 글이지, 누구나 쉽고 즐겁게 읽으라고 쓰인 게 아니다(철학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학술적 글은 이에 해당된다). 나를 위한 글이 아니라고 화가 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극단적으로 분노를 표하는 이들이 있는 건 무엇 때문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는 지적 전능감의 훼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사회문화적인 환경은 시민의 자의식 과잉을 부른다. 각자의 인식 지평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평선 너머를 고려하지 못한다. 물론 고려하지 못하는 것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용납'하지 못하는 건 문제가 된다.


나의 사고능력/인식능력 외에도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도저히 인정하지 못한 채 분노와 조롱을 쏟아내는 이 현상은 대표적으로 문해력 논란으로 표출된다. 해석되지 않는, 어려운 글을 만났을 때 '그런가 보다'하지 못한 채 훼손된 지적 전능감/자의식을 조롱으로서 회복하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것/볼 수 없는 것은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될까?


사람마다 주어진 상황이 다르고 취향도 다르다. 특정한 분야(이를테면 예술/철학)에 관심이 없는 건 아무런 일도 아니다. 하지만, 너네는 존재해선 안된다고 악다구니를 쓰는 순간부터가 갈등상황이다. 한 번도 부서져 본 적 없는 벽은 무너질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허용치 않는 법이다. 명직논란의 본질은 자기 인식의 갱신과정이 전무한(또는 그렇게 유도하는) 교육환경/사회문화의 필연적인 귀결인 것이다.


쉬운 글이 좋은 글일까? 당연히 아니다. 좋은 글이 좋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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