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휼 시인,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
[흰 문장]
흰 문장을 읽는다
묵음의 무게가 심장보다 무거워 주저앉은,
매번 다른 말로 읽히는 줄거리의 결말은 열려있다
어느 날 돌아보면 주어가 바뀌고 서술어에
서술어가 붙어 안긴 문장은 목적어를 내게 물어온다
기록과 기억 사이
지워야 완성이 되는 이 문장의 방식은
믿음을 요하는 신앙에 가깝다
아버지가 생략된 나에게 봄은 언제나 바깥이었다
술잔을 돌리는 손목 끝에서 그려지는 동그라미는
떠난 자의 영혼,
어떤 부재는 너무 구체적이어서 더듬다 보면
내가 젖기도 했다
무명천으로 동여맨 얼굴을 더듬듯 백비*를 읽는다
울음에서 시작된 짐작들로 채워진 이 침묵의 경전은
나비가 되기 전에 읽어야 할 생의 목록일진대,
환부를 감싼 흰빛 위에 빽빽이 채워진 말
교열이 어긋난 이 비문을 누가 해독해 줄까
등 돌린 괄호에 질문이 잠기고
부재 속 당신은 익명의 빈칸을 서성이고 있다
* 제주4.3평화공원 전시 초입에 누워 있으며, 4.3이 정명되면 백비에 그 이름을 새겨 세울 예정이다.
예전에 전진성의 [역사가 기억을 말하다]에서 보았던 독일의 사라지는 기념비가 생각났다.
기념물은 보통 공동체의 기억과 결속을 위해 조성된다. 집단의 가치를 공공연하게 남기기 위한 기념물들은 그 집단의 이념과 제도화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그동안 도외시되었던 대상이나 배제된 기억을 기념하기를 원하는 공공의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경향의 기념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하여 미학자 제임스 영은 전통적인 기념물의 성격을 부정하는 ‘반기념비’라 칭하였으며, 독일 북부 함부르크 지방의 하르부르크에 위치한 <하르부르크 반파시즘 기념비>는 대표적인 반기념비 작품으로 일컬어진다.
하르부르크 반파시즘 기념비는 하르부르크 시민들과 방문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촉구하며 기념비 위에 서명을 남길 것을 요청했다. 공공의 참여로 인해서 작품의 표면이 채워질수록 기념비는 서서히 낮아졌고, 처음 공개된 1986년 이후부터 7년 동안 서서히 소멸하다가 1993년에는 지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사라지는 기념비는 기억을 물리적인 구조물에만 의존하지 말고, 개인이 능동적으로 기억하고 반성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기념비가 땅속으로 점점 사라지는 과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사회가 과거의 잘못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경고를 상징한다.
기념비가 사라지는 과정은 시민의 참여를 통해 완성되며, ‘기억’은 국가가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전통적인 영구 기념비와 달리, 사라지는 기념비는 ‘기억은 행동이며, 지속적인 성찰을 요구한다’는 태도를 보여준다. 결국 이 기념비는 파시즘의 반복을 막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기억하고 행동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묻는 공간이다.
수년동안 어떤 이야기도 담아낼 수 없이 4.3평화기념관에 누워 있는 백비에 무엇을 새겨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