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본 눈 삽니다
"안 본 눈 삽니다!"
오랫동안 덕질 인생을 살았습니다.
(누구 덕질했는지,,, 그런 건 비밀. 안 알려줌 ㅎㅎㅎ)
덕질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 중에 '안본 눈 삽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때로는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충격적이거나 보기 불편한 장면(덕질하는 대상의 짤일 수도 있고, 글이나 말일 수도 있습니다)을 보고 나서 “차라리 안 봤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후회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저는 주로, 엄청 기다리던, 제가 덕질하는 운동선수의 아직 보지 못한 경기, 제가 덕질하는 가수의 공연 첫 장면, 또는 엄청 기다리던 덕질하는 배우의 드라마나 영화의 첫 장면을 보고 난 직후에 "안 본 눈 삽니다"라는 말을 씁니다. 보기 직전 어떤 장면을 보게 될 지 모른 채 기다리는 그 마음, 첫 장면을 마주했을 때의 기쁨과 환희, 그런 것을 다시 느끼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여행도 비슷합니다. 여행 가기 전, 어디를 갈까 찾아볼 때, 또 집을 막 출발해 공항으로 향할 때, 그 때 제 상태가 가장 순수합니다. 여행에서 앞으로 벌어질 모든 상황과, 앞으로의 만나게 될 모든 사람에게 열린 마음인, 그런 상태입니다.
10년을 일하면서 너무나 많은 배움이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너무나 많은 것이 채워졌습니다. 그 경험과 배움들, 물론 소중합니다.
그러나,
채워져 있으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자리가 없습니다.
무한했던 처음의 가능성은 유한한 것들, 현실적인 제약들로 대체되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순수했던 가치에 대한 믿음이, ‘가능할까?’ 하는 의심으로 대체될 수 있습니다.
하나였던 마음이 둘로, 셋으로 갈라질 수 있습니다.
새롭게 시도하려는 마음이 시작도 하기 전에 지쳐 버릴 수도 있습니다.
'전에 안 됐었는데...', '다 해 봤는데...'
가장 위험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숙련자가 되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시 초심자가 되려고 합니다.
“초심”은 “시작하는 마음”입니다. 10년 차가 된 저에게 가장 필요한 마음입니다.
우리의 '본래 마음'은 그 자체 안에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래 마음 안에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스스로 충분한 상태인 이런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이 말은 마음을 닫으라는 뜻이 아니라, 빈 마음과 준비된 마음 상태를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비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든 항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대해서 열려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가능성이 많지만, 숙련된 사람의 마음에는 가능성이 아주 조금밖에 없습니다. (주)
제가 일을 시작하고 4개월 차에 써 놓은 "새로운 길"(https://brunch.co.kr/@arachi15/233 참고)이라는 글을 보니까, 일을 시작할 때 저에게는 “초심”, 즉 “시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어떤 습관에도 물들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어떤 가능성이든 받아들이거나 의심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었습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었습니다.
마음에 이원적인 것은 없었습니다. 단 하나의 마음이었습니다.
'스스로 충분한 상태'(주)였다는 점에서 꽉 찬 마음이었습니다.
동시에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 '빈 마음'(주)이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스스로를 제한하지 않았습니다.
특정한 것을 바라거나 갈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얻은 것이 없었기에 잃을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내가 이걸 성취했다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처럼, 순수하게 모든 것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호기심으로, 창의적으로, 가능성으로 모든 것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아무 것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막 태어난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만나는 모든 사람을, 모든 상황을 마주하고 싶습니다.
얻으려고 하면 잃을 것이요, 버리려고 하면 얻을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붓글씨 쓰듯이 진심을 다해 집중해 보려고 합니다.
초심은 비어 있고, 숙련자가 갖는 여러 가지 습관에 물들지 않은 상태이며, 어떤 가능성이든지 받아들이거나 의심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이것은 사물은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마음, 점진적으로 섬광처럼 인물의 본래면목을 알아차릴 수 있는 그런 마음입니다.
(중략)
선을 하듯 붓글씨를 쓴다는 것은, 마치 처음 시작하는 사람처럼 가장 직접적이고 단순한 방식으로 글씨를 쓰는 것을 말합니다. 능숙한 솜씨로 아름답게 쓰려고 애쓰지 않고, 마치 자신이 쓰고 있는 것을 처음 쓰듯이 모든 주의를 기울여서 단지 쓰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본성 전체가 글쓰기에 담길 것입니다. 이것이 순간순간 수행하는 방식입니다. (주)
주1> 스즈키 순류,《선심초심》, 2013, 김영사.
표지 이미지> Image by Petra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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