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개덥네!
에어컨을 틀까 말까 하는 순간부터 여름이다. 겉옷 안쪽에 송골송골 땀 맺히기 시작하면 여름이다. 나무 그늘을 찾아 걷다 보면 여름이다. 얼죽아 아닌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이틀 연속 주문하면 그때부턴 여름이다. 평소에 자주 가지 않던 올리브영을 들락날락거리면 여름이다. 아이폰 케이스를 벗겼다 끼웠다 하면 여름이다. 무심코 자신의 나이를 계산하다 반년이 흘렀구나 하고 여름이다. 저녁식사 시간을 늦춰 먹으면 여름이다. 물냉면, 비빔냉면, 소바, 콩국수, 짬뽕, 우육면, 칼국수 등등 밥보다 면을 더 찾아먹다 소화불량에 시달리면 여름이다.
벚나무가 연분홍 이파리를 모두 털어내고, 진한 초록을 머금으면 여름이다. 자귀나무의 붉은 털실 같은 꽃에 땀방울이 맺혀있을 것 같으면 여름이다. 느티나무 잎이 우거져 그늘을 짙게 드리우고, 옻나무 잎에 윤기가 흐르면 여름이다. 저 나무나 꽃엔 관심 없고, 그 그늘 밑에 오래 서 있고 싶으면 한여름이다. 날벌레들이 눈앞에 아른거리면 한여름이다. 흐르는 땀이 눈에 들어가 무진장 따가우면 한여름이다. 나무 그늘 보다 에어컨 밑으로 들어가고 싶다면 그건 여름이라기보다 게으름이다.
열린 창문이 있나? 찾기 시작하면 여름이다. 창문 문틈에 죽은 벌레들이 보이면 한여름이다. 택시보다 버스가 타고 심으면 여름이다. 내가 차가 있고 그 차를 당분간 운전하기 싫으면 한여름이다. 밤마다 찬물로 등목하고 잠자리 들면 여름이다. 밤마다 쉽게 잠들지 못하고 냉장고와 화장실을 들락거리면 한여름이다. 여자친구가 없어서 외로우면 여름이다.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친구들 모여 밤새 술 마시고 싶으면 한여름이다. 연애하고 싶으면 여름이다. 연애를 방해하고 싶으면 한여름이다. 휴가를 못 가거나 휴가 계획이 없으면 여름이다. 평생휴가를 보내기 시작하면 한여름이다. 장마가 지나면 여름이고 장마가 그리우면 한여름이다. 새삼 그리운 게 여름이면 그리움을 가을로 미루고 싶은 게 한여름이다. 땡볕 속 사람이 보이면 여름이다. 그 사람이 나인 것 같으면 한여름이다. 아무것도 관심 없으면 여름이고, 관심을 바라면 한여름이다. 매미 울음이 권투글러브를 낀 것처럼 귀방망이를 때리면 여름이다. 너 자꾸 매미처럼 어딘가 매달리고 싶으나 상대방이 싫은 티를 팍팍 내면 한여름이다. 난 여름이고 너는 한여름이다.
왜는 여름이고, 어떻게는 한여름이다. 여름은 이유이고, 한여름은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