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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요가 3년 차에 생긴 일

적당히 슬기롭게 정신승리

by 임지원

아침 요가는 9시에 시작한다. 명상을 먼저 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명상 중에는 살금살금도 난리법석이 된다. 분주한 일상 속 그 짧은 고요한 시간을 누리기 위해 가능하면 제시간에 매트 위에 앉으려고 노력하지만 가끔은 임박해 도착하는 일도 생긴다. 요가 3년 차에 되니 수련 초기엔 입기 민망했던 상의 민소매 탑과 하의 레깅스가 당연해진다. 그래도 남보기 민망할 거 같아 긴 상의를 입어 하반신을 조금 가린 후 요가 매트를 들고 현관문을 나서면 갑자기 마음이 급해져 엘리베이터 앞에서 동동 거린다. 좀 더 일찍 준비할걸. 아이들에게 늘 하던 잔소리를 나에게 한다. 그렇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난 급히 들어갔는데, 종종 마주치던 아저씨 한 분이 서 있다. 아차차... 살짝 주춤했지만 최대한 빨리 도착을 해야 하니 간단한 목례를 하며 일단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저씨의 시선이 내 몸을 향한다. 난 아저씨보다 한 걸음 뒤에 서 있다. 아저씨는 그냥 앞을 보고 서면 될 텐데 굳이 몸을 내 쪽으로 향하고 날 본다. 나도 모르게 매트를 몸 앞쪽으로 가져왔지만 다 가릴 수 없다. 게슴츠레 뜬 그의 눈... 눈동자는 보이지 않지만 몸과 고개의 각도가 날 보고 있음을 말해준다. 분명 짧은 시간일 텐데 너무너무 길게 느껴진다. 여전하네 이 아저씨...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아저씨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한 마디 건넨다. "운동 가시나 봐요."


다행히 제시간에 도착해 명상을 하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러운지 몇 번이나 깊은숨을 내쉬며 평정심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긴 명절 끝 수련이라 몸이 잘 풀리지 않는 바람에 난 더 집중했고 그 바람에 그 아저씨에 대한 더러운 느낌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난 거 같았는데 아니었나? 자꾸만 혼잣말을 한다. 갑자기 "뭘 봐?" 그랬다가 이번엔 "그렇게 빤히 보시면 오해받으세요, 그냥 앞을 보세요", "왜 빤히 보냐고!!!" 분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큰 딸에게 하소연을 하니, 자기는 아주 빈번하게 겪는 일이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난 50대지만 딸은 20 대니 더욱 그럴 만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 딸에게 이런 하소연을 자주 들었다. 그땐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냐며 그냥 예쁘게 하고 다니라고 했는데, 미안해지네... 누군가는 그 아저씨가 네 다리를 직접 만진 것도 아니고 그저 바라본 건데 그게 그렇게 기분 나쁠 일이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아저씨가 나를 빤히 바라본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내가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할 거라고 그가 생각했다는 거. 난 그게 너무너무 기분이 나쁘다. 퇴근한 남편에게 이야기하니 별 일 아니라는 듯 "그 나이에 쳐다봐주면 고마운 거 아니야?" 그 순간 각자의 방에서 스마트폰을 쥐고 놀고 있던 두 딸이 득달같이 뛰어나와 목소리를 높인다. 아빠!!!!! 그게 말이 돼!!!! 늘 이런 식이지 이 남자. 좋으면 싫다고 하고 싫은 건 억지로 좋다고 한다. 말은 저렇게 해도 남편의 진심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당장 그 눈동자가 게슴츠레한 아저씨가 사는 집을 찾아가 벨을 누르고 "뭘 봐!" 같은 나의 혼잣말을 투척할 수 없다면 차라리 고마워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정신승리가 아닐까? 다음에 또 엘리베이터에서 그 아저씨를 만난다면... 어떻게 할까? 일단 서 있는 아저씨 뒤로 가서 등 뒤에 바짝 선다. 아저씨가 뒤 돌면 눈이 딱 마주친다. 그리고... 윙크? 너무 놀라시려나? 아니면 겉옷은 벗고 민소매 상의와 레깅스 차림으로 허리춤에 손을 올린 후 이렇게 말해볼까?

"러닝 요가 3년 차거든요, 중년인 제가 무려 13킬로 다이어트 성공입니다. 대단하죠!" 에효... 그저 또 혼잣말이다. 문득 그 유명한 '섹스 앤 더시티'의 언니들이라면 이 아저씨를 어떻게 참교육할지 궁금해진다.

그냥 쳐다보기만 했는데 무슨 문제냐고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던 건 다시 한번 제대로 사과해야겠다.

"미안합니다."

섹스앤더시티의 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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