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신부님께서 피정을 하시는 날이라, 안나의 집에 가도 신부님을 뵐 수 없다.
신부님께서 안 계신 안나의 집은 앙꼬 빠진 찐빵과 같지만, '열심히 설거지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갔다.
그런데 신부님께서 계시는 게 아닌가?!
오늘은 안나의 집 27주년 생일이라 계신다고 했다.
신부님을 뵈니, 마치 갑작스러운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신부님께서는 늘 그렇듯 천사같이 환한 미소로 인사하신다. 값비싼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에너지다.
기도로 시작된 배식 준비 시간. 오늘도 칼질을 열심히 하고 있는 나를 신부님께서 잠시 부르셨다.
"4일 뒤에 베네딕다(세례명) 축일이에요. 그날 미사 때 기도해 줄 거예요." 하셨다.
신부님이 양파를 썰고 계셨는데, 옆에 있던 나는 양파의 매운맛 때문인지 신부님의 사랑 때문인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신)과 친한 사람이 하는 기도는 얼마나 힘이 있을까.
날씨가 많이 더워서 그런지 오늘따라 봉사자분들이 적다. 그래도 신부님의 사랑 덕분에 힘이 난다.
역시 사람은 생기가 돌아야 힘이 난다. 마이클 싱어는 이 '생기'가 먹는 것이나 자는 것과는 상관없다고 하셨다. 연인과 헤어진 사람이 다 죽어가다가 기다리던 연인에게 연락이 왔을 때, 갑자기 기운이 솟구치는 것에 비유된다고 했다. 기운은 물질적인 것에서만 오지 않는다.
양자 물리학에서 모든 것은 결국 같은 양자로 이루어져 있고, 배열에 따라 다른 물질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생각도 같은 물질이고 모든 것이 다 똑같다. 내가 한 공간에서 어떤 생각을 하느냐는 내가 그 공간에 이로움을 내뿜을 수도, 해로움을 내뿜을 수도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사람의 생각들이 모여 그 공간의 에너지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나의 집의 에너지는 신부님과 직원분들, 봉사자들 덕분에 선하고 좋다.
37도를 육박하는 날씨에 뛰어다니시는 신부님의 머리칼이 다 젖었다.
아이들도 어른들 말씀을 안 듣기도 하고 고집부리기도 하는데, 신부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타국에 오셔서 가장 낮은 곳에서 일하고 계셔서 그런지 '그냥 맑음'이시다.
그래서 신부님을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 사람은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니까.
안나의 집 생일 기념이라 노숙인 분들께 선물을 나눠주셨는데, 봉사가 끝나고 주방장님께서 우리도 하나씩 가져가라고 하셨다.
"제가 가져가지 않으면 노숙인분께 더 드릴 수 있잖아요." 하고 말씀드렸더니,
주방장님께서는 "그렇긴 한데, 신부님께서 봉사자분들이 더 중요하다면서 꼭 드리라고 하셨어요."라고 하신다.
선물 꾸러미 안에는 과자와, 컵라면, 떡, 칫솔, 양말 등등이 들어있는데,
물질적으로는 가난한 신부님께서 주신 아주 큰 선물을 받은 느낌이어서 뭉클했다.
며칠 뒤 새벽미사를 드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신부님께 문자가 왔다.
신부님은 살아계신 성인(Saint)이신데,
내가 살면서 이런 분을 가까이서 뵙고
함께 이야기하면서 울고 웃을 수 있다니
참 감사한 일이다.
올해 봄에는 신부님께서 허리가 아프셔서
개인 트레이닝을 2번 해드렸다.
신부님께서 허리가 아프신 건 무지 속상한 일이었지만, 나에게는 정말 큰 영광이었다.
직접 미사성제를 올리시는 사진도 보내주셨다.
내가 이렇게 큰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나?
사실 우리는 자격이 없지만, 큰 사랑을 받고 살고 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은 것이다.
안나의 집에서 만난 언니들도 나에겐 참으로 감사한데, 신은 나의 성장에 필요한 말씀들을 사람들을 통해서도 말씀해 주신다.
신부님의 사랑과, 봉사자분들을 통한 배움.
작은 것을 내어드리지만, 아주 큰 것을 받는다.
가끔 유혹이 밀려온다.
'다음 주엔 일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봉사는 다음에 가...'라며.
'근데요, 신부님이 이렇게 잘해주시면 저 봉사 못 빠지잖아요!
다음 주에 뵐게요, 신부님 :)
사랑해요. 저도 신부님 위해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