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이사를 하며 선물로 받은 나무 화분이 배송과정에서 이곳저곳 훼손된 상태로 배송이 되어 농원 사장님과 교환문자를 주고받으며 주말 아침 일찍 화분을 들고 농장으로 찾아간 일이 있었다. 이른 아침의 그렇게 큰 농장을 방문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튼튼한 인도 고무나무 한 그루로 교환하고 사장님의 친절함에 감사하여 양란 화분도 하나 구입했다. 좋은 가격에 훌륭한 화분을 득템 하여 무척 기분이 좋았다.
"사장님 그런데 이렇게 이쁜 꽃이 다 떨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꽃이 다시 피길 바라시는 거죠?"
"네 그럼요. 꽃이 다시 피면 좋죠."
"아 이거 영업비밀인데.. "
"그래도 알려주시면 안 돼요?"
"나무를 그냥 추운 베란다나 어디밖에 그냥 내놔 버리세요. 비바람 다 맞도록 힘들게 내버려 두면 어느 순간 꽃이 펴요"
이건 정말 놀라운 사실이었다. 온실 속 화초가 사실 온실 속에서 고이고이 피어난 것이 아니라 꽃을 피우기 위해 햇볕과 비바람을 홀로 온몸으로 받고 비로소 꽃이 핀다는 것은 꽃나무에 문외안인 나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순간 단지 화훼농장의 영업 비밀을 넘어 마치 우주의 비밀을 엿들은 기분이었다.
'꽃길만 걷길 바란다'는 말이 한참 유행이었다. 꽃길만 걷길 바란다는 말은 네 앞날이 순탄하고 영광스럽길 바란다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꽃길을 만나길 위해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인생의 많은 역경과 바람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반면 꽃길의 의미가 마냥 순탄한 길을 의미한다면 어쩌면 우리에겐 성장할 기회도 더불어 고통을 딛고 비로소 꽃 피우는 찬란함을 맛볼 기회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꽃길만 걷길 바란다'는 말은 우리가 가는 이 길이 결국에는 너라는 꽃이 활짝 피는 그런 길이길 바란다는 맥락으로 이해함이 좋을 것 같다. 이렇게 볼 때 꽃길 뒤에 붙는 이 '만'이라는 조사가 다소 모순적이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까지는 그야말로 봄부터 울던 소쩍새나 비바람 등 우주만물의 섭리가 그 안에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내 아이들에게 내가 못 해준 것들에 대해 생각하며 미안해한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엄마도 완벽하지 못하다. 신이 나에게 아이를 허락했을 때 절대 완벽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완전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각자의 미성숙과 미성숙이 만나 덜컹거리며 결국 성숙으로 나아가는 길 그것이 인생 아닐까. 나이 든다고 모두가 성숙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아픔을 이겨내면 한 걸음 더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그 아픈 순간에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의 미성숙과 부족함이 설사 내 아이들에게 결핍된 부분을 만들었더라도 우리 각자의 결핍이 오히려 성장과 도약의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면 나는 너무 낙천적인 사람인건가? 이것이 인생의 반전매력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물론 거기에는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성장통이 동반돼야 겠지만 말이다. 그것이 뒤바뀌는 기적을 일생을 통해 확인하는 작업, 그것이 나를 꽃피우게 하는 꽃길이리라 짐작해 본다.
꽃이 진 나무라도 모진 비바람을 맞도록 밖에 내놓을지언정 절대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모진 비바람 속에서 죽거나 혹은 꽃 피우거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