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생각 #16
그 여자는 절 살림을 맡아보는 보살이었다.
보살이라지만 속세와 가까웠다.
질투와 분노도 많았고, 부정적인 생각이 태반이었고, 그래서 늘 불평과 불만으로 들끓었다.
음식 맛도 들고나고 했다. 기분이 좋을 때는 좀 더 맛있고, 기분이 나쁠 때는 맛이 덜했다.
보살에 대해 품고 있는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얼마 전 갑자기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단다.
아침저녁으로 일교차가 컸던 사월의 어느 날이었다고 했다.
평소에 강단 있던 그녀가 심장병으로 죽은 것도 그렇고, 혼자 남게 된 스님의 모습도 처량하게 느껴졌다.
혼자 남게 된 스님을 위해 부엌을 정리하게 됐다.
보살이 죽은 후로 냉장고 정리를 엄두가 나지 않아하지 못했다고 했다.
살림이라곤 어쩌다 한 끼 먹는 집밥 준비, 그것도 일품요리로만 준비하는 나로서는 보살의 살림살이가 경이에 가까웠다. 일단 두 개의 냉장고에 그득그득 음식들이 쌓여있었다. 거기에 김치냉장고가 두 개가 더 있었고, 장독대와 저온창고에도 먹거리가 가득했다.
일단, 보살이 생전에 장만해 두었던 음식들을 모두 모아서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고, 젓갈류와 김치 종류를 일차적으로 냉장고에 넣기 시작했다. 스님이 옆에 와서 이것저것 훈수를 들거나, 추억에 잠기거나 했다.
도라지청이 냉장고 깊숙한 곳에서 나오자, 하루 종일 가마솥에 도라지를 끓여 졸이고 졸여 만든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맛도 한 번씩 봤다. 도라지의 알싸한 끝 맛과 단맛이 어울려 입안에서 녹았다. 꿀에 잰 마늘도 마늘맛과 꿀맛이 어울려 독특한 맛을 냈다. 그뿐이랴, 청귤청, 유자청, 손수 농사지은 땅콩과 예쁘게 깎아둔 호두…. 그때마다 스님이 강조하는 것은 손수 농사지어 만든 음식들이라는 것.
항아리와 저온저장고에도 보살이 살아생전 준비해 놓은 양식들이 엄청나다는 말을 하며 끝내 눈물을 보였다. 절 살림을 맡아한 그녀의 노고에 새삼스럽게 감사했음이리라. 그렇게 시작한 그녀의 살림 내공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오래된 반찬을 정리해서 버리고 냉장고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삶이 곧 흔적이어서 보살은 떠났지만 삶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래서 삶의 순간순간이 중요하고,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보인다’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죽은 자의 최후이다. 그가 누구이건 말이다.
보살의 흔적은 부엌에 남아 빛을 발했다. 스님을 위한 사계절의 저장 음식과 음식 재료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놓은 그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그것을 정리하는 이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것이다.
정리하면서 모두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내가 죽은 후에 남는 흔적들은 무엇일까?
보살처럼 부엌이 아닐지라도 어딘가에 남아있게 될 내 흔적을 상상해 보았으리라.
삶의 끝은 결국 다른 누군가의 손에 의해 정리되는 것이니, 내 삶의 흔적들을 되돌아보면서 남게 될 흔적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내가 남길 흔적은 ‘글’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