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디의 노블 테라피 Aug 01. 2024

"좀처럼 결합되지 않는 과거의 조각들"

[눈으로 만든 사람], 최은미

_"어떤 사실 따위를 인정하고 용납하거나 이해하고 수용하다"

국어사전에서 찾은 '받아들이다'의 뜻이다. 두어 번 되읽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가 가장 못하는 것이어서. 사실 나는 모든 것을 잘 못하는 사람이지만 그중에서도 받아들이는 일을 가장 못하는 것 같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건 나이가 들면서 알았고, '받아들임’이 삶에서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능력(?)인지는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에게 묻는다. 왜 받아들이지 못하니. 그럴 때도 됐는데 왜 '어떤 사실 따위를 인정하고 용납하거나 이해하고 수용하'지 못하니. 왜. 이렇게 자문하다 보면 스멀스멀 자책감이 피어오른다. 이건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스스로를 책망하는 자책감과는 다른 종류의 자책감이다. 수치심에 가까운 자책감이다.


나는 무엇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왜 받아들일 수 없는가. 어째서 나는 고집스럽고도 어리석게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는가.


그것은 불행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나의 불행이어서다. 사실 나는 이미 많은 것을 받아들였다. 태어나면서부터 내게 주어진 것들. 세상에 나와 보니 내 손에 쥐어져 있던 것들. 살아가면서 내가 움켜쥐고 거머쥐게 된 것들. 대부분 운이 좋아 누리게 된 그런 것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당연하고 마땅하다는 듯.

내가 받아들인 것은 또 있었다. 타인의 불행과 불운들. 내가 알고 있고 알지 못하는, 어쩌면 알려고도 하지 않는 그 무수한 불행과 불운들은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불평등과 불행이라는 불가해한 수수께끼에 대해 의혹을 품고 어쭙잖은 고뇌에 시달리기는 했을지언정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에 어려움은 없었다.


_그래서 부끄럽다. 받아들이지 못해서 부끄럽고 받아들여서 부끄럽다. 집요하리만큼 받아들이지 못해서 부끄럽고 어려움 없이 받아들여서 부끄럽다. 이제 나는 두렵다. 왜 하필 나라며 완강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과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어려움 없이 받아들이는 것들이 실은 한끗 차이라는 사실이 두렵다. 그러니까 아무 잘못 없이, 한순간에, 우연히, 어쩌다 보니, 그럴 운명이라는 이유로, 나와 당신의 삶이 전혀 다른 것이 되어버리거나 당신과 나의 삶이 뒤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 무섭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게 안 된다면 받아들인 척 살아가야 하는 게 삶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나는 아직도 어렵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읽는다.


"맘카페에 들락거리는 그 마음을 나 또한 모르지 않았다. 어디에도 말할 수가 없는 마음, 너무 사랑해서 말할 수 없고, 사랑하지 않아서 말할 수 없고, 가까워서 말할 수 없고, 멀어서 할 수 없고, 구차하고 흔해서 말하고 나면 별게 아닌 게 되어버리는 얘기들. 힘내라는 댓글 딱 하나만 보고 내리려고 올리는 글들.(...)즉각적인 공감과 위로를 받고 고개를 끄덕이며 글을 내린다. 하지만 매일 얼굴을 보는 사람 앞에선 에어프라이어로 뭘 해먹을까 얘기만 하는 것이다."(p.23)


"너무 웃기지 않니? 그렇게 귀한 아이였는데, 난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p.117)

매거진의 이전글 나만의 음악소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