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이주혜
_"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었다. 구루미 라떼 아로니아 바로네즈 3세랍니다. 그 사람이 그림책을 읽어줄 때처럼 다정하게 설명했다. 라떼는 친구가 붙여준 이름이에요. 털이 하얀 우유 거품과 에스프레소가 섞여가는 라떼 색깔이라고요. 아로니아는 이 고양이를 처음 구조한 사람이 지어준 이름이랍니다. 이 아이는 근처 아로니아 농장에서 구조되었거든요. 형제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는데 어미가 외면했대요. 지브래 애니메이션을 무척 좋아하는 우리 어머니가 <고양이의 보은>에 나오는 바론처럼 반드시 남작 칭호를 붙여줘야 한다고 고집했는데 이 아이가 여자애라서 바로네즈 3세가 된 거예요. 물론 바로네즈 1세는 어머니지요. 구루미는 가게 이름을 딴 거라고요? 그 사람이 나를 말갛게 바라보더니 수줍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예, 내 이름이기도 하고요."(p.154)
_처음 이 부분을 읽을 땐 무심코 책장을 넘겼다. 어쩌면 엷은 미소가 입가에 설핏 어렸을지도 모르겠다. '그 고양이'에게 '구루미 라떼 아로니아 바로네즈 3세'라는 이름을 지어준 이의 마음이 다정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5자나 되는 긴 이름이 다른 의미로 다가온 건 늘 그래왔듯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뒤 발췌한 부분을 옮겨 적으며 다시 읽을 때였다. 문득 궁금해졌다.
내 이름은 무엇일까. '그 고양이'의 이름을 지은 작명법으로 지금 내 이름을 짓는다면 나는 어떤 이름을 갖게 될까. 내가 지은 내 이름과 나를 아는 다른 이들이 지어준 내 이름은 같을까 다를까. 다르다면 어떻게 다를까. 앞으로 내 이름은 어떻게 달라질까. 예측할 수 없는 삶은 내 이름을 또 어떻게 바꿔놓을까. 삭제되는 것도 수정되는 것도 추가되는 것도 있겠지. 그렇다면 나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이름을 지닌 채 혹은 남겨둔 채 사라지게 될까.
이런 의문은 다른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작명법을 적용한다면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이들은 어떤 이름을 갖게 될까. 또 앞으로 어떤 이름으로 바뀌게 될까.
그렇게 의문과 생각을 거듭하다보니 어느 순간 뒷목이 선득해졌다. 지금 이 순간 책상에 앉아 어쭙잖은 글을 끄적이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그냥 '나'가 아니구나. 이 보잘것없는 몸뚱이에도 역시 보잘것없을지언정 고유한 역사가 깃들어 있구나. 나는 고유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지닌 사람들을 매일 만나고 있구나. 나든 당신이든 우리 모두는 고유한 역사를 품은 채 살아가는 "실로 어마어마한" 존재들이구나. 새삼 놀랄 것도 없이 빤한 깨달음이지만 내가 느낀 경외심만은 전혀 진부하지 않았다.
이름이 긴 건 고양이 '구루미 라떼 아로니아 바로네즈 3세'만은 아니었다.
_"웃을 일이 아니야. 그런 일이 진짜 일어나."(p.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