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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주년 특집] 붓으로 그린 국가, '민족기록화

by 데일리아트

박정희와 김종필, 민족을 그리도록 명하다

1967년 여름, 전위적인 추상화가들을 포함한 당대 최고의 화가들을 대거 동원해 거대한 역사화를 그리게 한 《민족기록화전》. 1회에서 우리는 이 전시의 풍경을 상상해보고, 그것이 한국 미술사에서 오랫동안 외면받아 온 이유를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과연 누가 어떤 의도로 기획한 것일까? 화가들은 왜 이 정치적인 주문에 응했던 것일까?

5·16 군사 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와 그 세력에게는 시급한 과제가 있었다. 바로 정당성의 확보였다. 민주적 절차를 무너뜨린 쿠데타라는 불명예를 씻고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그들의 집권이 구국의 결단이었음을 증명할 강력한 명분과 서사가 필요했다. 그들이 내세운 기치는 조국 근대화와 민족중흥, 그리고 반공이었다. 가난을 몰아내고 분단된 조국을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지켜내겠다는 약속은 강력한 호소력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문화예술은 단순한 여가가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정신적 동력을 공급하고, 국민을 하나로 묶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여러 연설을 통해 문화예술에 대한 생각을 명확히 드러냈다. 문화예술이 “조국 근대화와 민족중흥을 다짐하는 거국적 혁신운동의 정신적 뒷받침을 담당(1964)”해야 하며, “국난을 극복하고 국민 총화를 구현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1973)”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의 시선에서 예술의 가치는 미학적 성취 이전에 교육적, 사회적, 정치적 역할에 있었다. 붓은 국가의 이념을 국민의 마음에 새기는 섬세하고도 강력한 도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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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37명의 위인상이 서울 태평로에 전시되었다. /출처: 조선일보

박정희의 이러한 구상을 프로젝트로 구체화한 인물은 바로 그의 최측근이자 군사 정변의 핵심 인물이었던 김종필이었다. 초대 중앙정보부장과 공화당 의장을 거치며 정권의 2인자로 군림했던 그는 민족기록화 사업의 실질적인 기획자이자 추진자였다. 김종필이 문화예술을 권력의 기반을 다지는 도구로 활용한 것은 민족기록화가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1964년, 대학 조소과 학생들을 동원해 이순신, 세종대왕 등 위인 37명의 상을 제작하고 이를 서울 태평로에 일렬로 세우는 사업을 주도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의 경관을 바꾸고 일상 속에서 시민들이 위대한 민족의 역사를 마주하게 하려는 시도였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시각 이미지가 대중에게 미치는 강력한 힘을 확인했을 것이다.

몇 가지 청사진: 일본, 북한,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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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김종필의 주도로 열린 《민족기록화전》의 참여 작가와 작품 목록은 위의 표를 참고하길 바란다. 김종필과 박정희 정권이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구상할 때 참고했을 법한 몇 가지 ‘청사진’이 존재한다. 여기서는 일본, 북한, 미국의 사례를 확인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 군부와 신문사가 주도했던 《성전미술전람회(聖戰美術展覽會)》를 비롯한 전쟁미술전람회이다. 군부가 국민의 호국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전쟁을 화면에 옮기고 당대 최고의 화가들을 총동원했다는 점. 작품의 크기가 큰 대작 중심이었다는 점. 그리고 완성된 작품을 엽서로 제작해 대중에게 유포했다는 점까지, 일본의 전쟁화 사업은 한국의 민족기록화 사업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다.

두 번째 청사진은 의외의 장소인 북한에 있었다. 1957년, 북한은 이미 을지문덕, 박연 등 역사적 위인들의 초상화를 그리고 이를 엽서 세트로 발행했다. 남한보다 먼저 민족 주체성을 강조하며 자신들이야말로 한반도의 정통성 있는 정부임을 대내외에 선전하고 있던 것이다. 끊임없이 북한과 체제 경쟁을 벌여야 했던 박정희 정권에게 북한의 이러한 행보는 민감하게 의식될 수밖에 없었다. 남한 또한 위대한 민족사의 계승자임을, 그리고 반공의 자유 대한민국이야말로 진정한 정통 국가임을 시각적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경쟁 심리가 민족기록화 사업의 중요한 추동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 청사진은 화가들의 입장에서 제시되었다. 1930년대 대공황 시절, 미국 루스벨트 정부가 추진했던 뉴딜 정책의 연방미술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당시 정부는 대규모로 실업 화가들을 고용해 공공건물에 벽화를 그리고 미술 작품을 제작하도록 지원했다. 훗날 《민족기록화전》에 참여한 화가 김태는 “김종필 씨의 화가 친구들이 미국의 뉴딜 정책을 예로 들어, 화가들에게 공공 프로젝트를 주어 실행하게 할 것을 건의했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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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타 쓰구하루, 애투섬의 옥쇄, 1943 /출처: 일본 도쿄국립근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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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초상화 기념 엽서, 1957, /출처; 신수경, 북한의 역사인물 초상화 연구, 2019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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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 '비둘기 부대 환송식' 기념 엽서, 1967 /출처: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예술가들의 선택: 강압인가, 달콤한 제안인가

이 김태의 증언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시사한다. 민족기록화 사업이 단순히 권력의 일방적인 명령이 아니라, 화가들의 현실적인 이해관계와 맞물려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는 화가들 역시 국가 주도의 대규모 후원 사업에 대해 기대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는 물자가 극도로 귀하던 시절이었다. 변변한 캔버스와 유화물감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국가가 직접 최고급 재료를 제공하고, 1000호에 달하는 대작을 제작할 기회를 준다는 것은 화가들에게 거부하기 힘든 달콤한 제안이었을 수 있다. 여기에 국가적 사업에 참여한다는 명예욕과 사회에 봉사한다는 사명감, 그리고 이 프로젝트를 발판 삼아 화단에서 입지를 확고히 하는 출세욕이 더해졌을 수 있다. 특히 추상화가들의 경우, 그들이 추구하던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정체성에 대한 탐구는 민족이라는 거대 담론과 만나는 지점이 있었다. 비록 표현 방식은 달랐지만, 서구의 것을 넘어 우리 고유의 것을 찾는다는 목표는 민족기록화의 명분과 기묘한 공통분모를 가졌다. 이처럼 민족기록화 사업에 참여한 화가들의 동기는 강압과 자발성, 순수와 타협, 예술적 도전과 현실적 욕망의 경계가 매우 모호한, 복합적인 것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55점의 거대한 그림들은 전시장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것들은 곧 미술관의 높은 벽을 넘어, 보통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음 3회에서는 미술관을 나온 그림들이 어떻게 손바닥만 한 엽서로 변신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갔는지, 그 과정에서 원본의 의미가 어떻게 변질되고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냈는지 확인해볼 것이다. (3부는 8월 15일 게재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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