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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일의 문학과 영화 넘나들기 ③] 실패하는 길이 성

by 데일리아트

김기림 「바다와 나비」와 영화 '우리집'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누구에게나 아무 걱정도 없이 즐겁기만 했던 유년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유년이 낙원이었던 이유는 마음껏 실패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여섯 살에서 일곱 살, 아홉 살이나 열 살까지는 원 없이 놀 수 있는 자유가 허락되어야 한다. 그 시간의 즐거움, 그 시기의 행복을 추억하며 남은 세월 동안 ‘밥벌이의 고단함’을 버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는 유년을 막 벗어난 소년의 실패와 모험을 탁월하게 형상화해 낸 시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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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산인터넷뉴스

아무래도 수심은 ‘인생의 수심’일 것이다. 인생의 깊이를 누가 가늠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인생이라는 수심의 깊이를 알려줄 수가 없다. 부모조차도 그렇다. 그러므로 인생은 각자 홀로 지고 가야 할 숙제인 것.

흰나비는 왜 바다가 무섭지 않을까? 아직 인생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직 인생이라는 경기장에서 뛰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인생의 경기장에 나서기 전에 우리는 ‘도무지 바다가 무서워 보이지 않는’ 시기를 거치게 된다. 내게도 겁이 없는 시기가 있었다. 아니, 겁을 모르는 시기였다. 사춘기라는 중2와 중3 질풍노도의 시간들.

청(靑) 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중학생이 되면서 내게도 겁을 모르는 사춘기의 시간이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아! 지워버릴 수 있다면 무로 돌려버리고만 싶은 시간들.

날개가 물결에 절여진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날개가 떨어져 나가기 직전이 된다는 뜻이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중2 때 반 아이들은 나를 ‘미친개’라고 여겼을 것 같다. 규율부장이라고 점심시간에 반 아이들을 10대씩 때린 일이 있었다. 한없이 여린 국어 선생님 시간에 악랄하게 떠들며 수업을 방해한 아이들을 나는 용서할 수 없었다. 어느 날 국어 선생님을 위해 정의의 사도가 되기로 결심했다. 점심시간에 80명의 아이들을 남겨 놓고 대걸레로 엉덩이를 열 대씩 때렸다. 800대를 있는 힘껏 때리고 나니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 있었다. 나보다 싸움을 잘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서슬 퍼런 내 광기에 질려 꾹 소리 못하고 열 대씩을 맞았다. 누군가 자기 차례가 아닐 때 도시락을 먹으라고 말해 준 덕분에 아이들은 점심을 굶지 않을 수 있었다.

그 광란의 폭력으로 얻은 건 무엇이었을까. 다음 국어 시간에 반짝 조용했던 아이들은 곧 원래대로 돌아가 버렸다. 그 대가로 친구들에게 철천지원수로 자리매김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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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용인시민신문

얼마 뒤 덩치가 두 배쯤 되는 친구가 싸움을 걸어왔다. 덩치를 따라 친구들과 함께 몰려간 공터에서 일대일 맞짱을 떴다. 나는 정의의 사도도 ‘백마 탄 왕자’도 아니었다. 덩치에게 바닥에 깔린 채 얻어맞기만 할 뿐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졌다. 너무도 수치스러워서 맞는 동안 아픈 걸 하나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그나마 끝까지 나와 함께해준 친구가 있었기에 겨우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올 수 있었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청무우 밭의 경험’은 아니었다. 중3 때 나는 겁 모르고 깡패 소굴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일진 보스의 동생이라는 친구가 같은 학년에 있었다. 그는 아침마다 호크를 채우지 않은 채 등교했다. 규율부장인 내가 불러 세워 호크를 채우라고 하면 인상을 쓰며 노려보곤 했다. 한번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따귀를 올려붙였다. 그러고 난 뒤엔 깡패 형이 찾아올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고등학생이 교실로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당시에 내가 다이던 중학교는 고등학교와 나란히 붙어있었다.

며칠 뒤 재수 없게 그 깡패 동생과 교문에서 또 마주쳤다. 이번에도 녀석은 인상을 쓰며 노려보았다. 내 마음은 또 손이 올라가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몸이 먼저 반응해 버렸고, 내 손은 다시 서클 보스 동생의 뺨을 때리고 말았다.

이틀 뒤 친구와 하교하는데 교문 앞에서 비리비리해 보이는 고등학생 한 명이 나타났다. 그는 옆집 형이 집에 놀러 오라는 듯이 보스형이 부른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그 순간 내 마음은 ‘바다가 무섭지 않은 어린 나비’가 되었다. 까짓 깡패들이 무서우면 얼마나 무섭겠냐는 치기가 생긴 것이었다. 비실비실한 메신저만 보고 깡패들을 우습게 여긴 것이기도 했다. 간절한 눈빛으로 만류하는 친구를 뒤로하고 나는 비실이를 쭐레쭐레 따라갔다. 그때만 해도 깡패 소굴의 폭력을 너끈히 이겨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 ‘어린 공주’의 기대는 바다에 꽃이 피길 바란 것과 다르지 않았으니….

그곳에서 나는 오래도록 집요하게 얻어맞았다. 녀석과 녀석의 형은 보이지도 않았다. 꼬붕들이 돌아가면서 때리고 겁을 주는 일이 반복되었다. ‘아, 이 고통이 언제 끝나려나?’ 생각하면서 나는 무모했던 선택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바닷속 수심처럼 깡패들의 폭력은 깊이를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끝 모를 공포 속에서 실컷 얻어터지고 난 뒤에 끝이 찾아왔다. 어둠이 내린 뒤에야 그들로부터 풀려났다. 어스름이 깊이 내려앉고 저녁 바람이 싸늘한 삼월이었다. 그 밤에 하늘의 달을 올려다본 기억은 없다. 올려다봤다면, 검고 시린 하늘에 새파란 초생달이 떠 있었을 것이다. 세상 물정 모르던 아이는 폭력에 거의 초주검이 되어 지쳐서 돌아왔다. 이제 어린 공주는 인간 사회에 얼마나 무서운 세계가 있는지, 폭력이라는 것에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 온몸으로 알게 되었다. 인생에는 새파란 초생달을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오는 시린 날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삶에는 ‘시도해 봤기에 알게 되는’ 것이 있다. 도전해 봐야만 배울 수 있는 일이 있다. 시도한다는 것은 실패한다는 것이다. 도전하는 일은 실패를 무릅쓰는 일이다. 때로는 처절하게 실패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패는 그저 실패가 아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시도했다가 실패한 사람은 이전과 다른 존재로 성장하게 된다. 영화 <우리집>의 주인공 하나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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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서울경제

영화 <우리집>에서 하나의 부모는 이혼 위기를 겪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이들은 안중에도 없는지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린다. 중학생 오빠는 그런 부모님과 담을 쌓은 지 오래다.

하나에게는 관계가 안 좋았던 부모님이 가족여행을 갔다가 사이가 좋아져서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하나는 부모님과 오빠에게 가족여행을 가자고 조른다. 아버지는 뜨뜻미지근하고, 오빠는 무관심하며, 어머니는 갈 마음이 없다. ‘가족이 함께 저녁 먹기’를 미션으로 정한 하나가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들어놓은 날에도 어머니는 왜 이런 걸 했느냐며 역정만 내신다.

그즈음 하나는 마트에서 우연히 마주친 유미, 유진 자매와 친해진다. 유미네는 부모님이 지방에서 일을 하셔서 줄곧 단둘이 지내고 있다. 열 살쯤 된 유미와 대여섯쯤으로 보이는 유진은 달동네에서 어렵게 살고 있다.

자신의 간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이혼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하나는 가족여행을 떠나기로 한 날 가출해 버린다. 가족여행이 기실은 ‘이별 여행’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날 하나는 유미와 유진에게 부모님을 찾아가자고 설득하여 무작정 보리 해변으로 떠난다.

세 아이는 네이버의 안내를 따라 시외버스를 잘 타고 간다. 하지만 잘 탄 건 거기까지였다. 갈아탄 시내버스 노선이 바뀌어서 길을 헤매게 된다. 하나는 유미 자매를 이끌고 한나절을 무작정 걸어 보리 해변과 비슷한 곳에 도착한다. 해변의 야영지에서 아이들은 운 좋게 비어 있는 텐트를 발견한다. 아내에게 갑자기 찾아온 진통으로 신혼부부가 급히 병원으로 떠난 뒤 남은 텐트였다. 텐트에 들어간 세 아이는 차려져 있던 음식들을 먹으며 굶주린 배를 채운다. 하나와 유진 자매는 신혼부부의 텐트에서 오붓하고 행복한 밤을 보낸다. 다음 날 아침 하나는 유미 자매를 데리고 서울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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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집에 도착해 보니, 자신을 찾으러 나갔는지 식구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하나는 가족을 위해 정성껏 계란밥을 만든다. 집으로 돌아온 부모님과 오빠는 하나가 무사히 돌아온 걸 보고 마음을 놓는다. 식탁을 차려놓은 하나가 가족들에게 앉으라고 말한다. 계란프라이가 가지런히 덮인 밥을 식탁에 내려놓은 후 하나가 가족들에게 말한다.

“우리 얼른 밥 먹자. 든든하게 먹고 진짜 여행을 준비하자.”

열두 살 하나는 영화 속에서 가장 ‘어른스러운’ 존재이다. 열두 살이 된 아이는 어른과 진배없으며, 더 성숙할 수 있다는 것을 영화 <우리집>은 아프게 보여준다.

열두 살 하나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외국의 주재원이 된 어머니를 따라갔을지 아버지와 국내에 남았을지, 단단한 내면의 청소년으로 성장했을지 일진 공주가 되어 사춘기를 험하게 지났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깡패 소굴에서 죽도록 얻어맞고 ‘날개가 절어서’ 돌아온 뒤 어떻게 되었는지는 안다. 3학년 2학기가 되면서 학년 전체에 서클 붐이 일어났다. 학년말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무슨 무슨 서클에 가입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때 나는 그 서클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얌전한 양이 되어 몸을 사리며 그 겨울을 지났다. 천방지축 험악한 시기에도 공부는 제법 해서 인근에서 가장 좋다는 인문계고 고교에 응시해 합격하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에너지에 휩쓸려 청무우밭인 줄 알고 바다로 날아가 보는 때가 있다.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도록 실컷 원하는 것을 해보는 시절은 너무도 소중하고 꼭 필요한 일이다.

「바다와 나비」를 읽을 때 나는 실패를 무릅쓰고 도전하는 삶을 떠올리게 된다. 「바다와 나비」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시도하는 마음의 근력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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