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스럽게 살기

행복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

by 심구손

프롤로그

새삼스럽게 살기


행복을 선택하면 보통 불행도 따라온다. 행복이라는 상품은 낱개 단위로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둘은 묶음 상품이기 때문에 불행을 줄이면 행복도 같이 줄어든다. 불행을 통제하려고 하면 행복을 느끼는 센서도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일방적으로 행복만 얻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 직접 행복'만' 만들면 된다. 이걸 잘 해내는 사람은 행복 생산성이 좋은 사람이다. 나는 행복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론으로 '새삼스럽게 살기'를 제안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새삼스럽다'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느껴지는 감정이 갑자기 새로운 데가 있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이건 아래와 같이 의역할 수 있다.


익숙함에 속지 않으면 세상이 새로이 보인다.


사실 가만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문장이라 호들갑 떠는 모습이 새삼스러울 수 있다(1). 하지만 돌고 돌아 다시 이 문장 앞에 섰을 때 느껴지는 엄숙함은 다르다. 새삼스럽게 산다는 것은 평소와 비슷한 일상을 다르게 바라보거나, 좋아하는 일상을 다른 방식으로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 늘상 있는 하루 속에서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에 감사함을 느낀다거나, 평범한 하루를 특별하게 만드는 활동들이 모두 포함된다.

인간이 불행을 자초하는 이유 대부분은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생각'나'는 대로 살기 때문이다(2).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은 쉽지 않다. 뇌를 쉬게 하는 시간이 그만큼 줄어들어 피곤하고, 생각대로 되지 않는 삶이 주는 좌절을 견뎌낼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픈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 생각하며 사는 삶이 반복되면 일상 곳곳에 생각의 결과가 묻게 되고, 경험치가 쌓일 수록 생각하는 시간은 줄어든다. 나중엔 '생각나는 대로' 살아도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처럼 된다.

(1)'새삼스럽다'에는 '하지 않던 일을 이제 와서 하는 것이 보기에 두드러진 데가 있다.'라는 뜻도 있다. 쉽게 말해, 뒷북 치고 있다는 의미다.
(2) 물론 생각하는대로 살려고만 해도 불행은 찾아 온다. 현재의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미래의 계획에만 온 신경이 가 있기 때문이다. 주로 완벽주의 성향으로 나타나곤 하는데, 경험상 뭐든 적당한 것이 좋다.


이 글은 무뎌진 행복 수용체 때문에 고심 많던 내가 찾은 지속가능한 행복법이다. 인간은 얼핏 보면 비대한 자존감으로 살고 싶어 하고, 빨리 살아가는 데 익숙하며, 더 많은 것들을 가져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처럼 보인다. 하지만 뭔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조용히 혼자 있고 싶어 할 때도 있고, 아무것도 안 하고 널브러져 있는 것을 즐기기도 하고, 조금을 가져도 갖고 있음에 감사할 줄도 안다. 전자의 인상을 받는 이유는 인간 사회가 필연적으로 경쟁 생태계고, 우린 생존 본능이 있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주목 받아야 하고, 더 빨리 목적지에 도달해야 하며, 더 많은 것들을 성취해내야 한다. 하지만 뒤처지지 않기만 하면 정말 행복할까? 그렇지 않다.

벨기에 리에주대학교 조르디 쿼드바흐 박사팀은 돈이 행복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이들 연구팀은 돈이 우리에게 수많은 상품 소비의 기회를 주긴 하지만, 소비 행위는 우리가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오히려 감소시킨다고 판단했다. 연구팀이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돈을 많이 버는 집단은 소득이 적은 집단과 비교했을 때 '긍정적인 감정 경험을 지속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또 다른 연구 결과도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심리학과의 소냐 뤼보미르스키 교수는 이런 현상에 대해 돈을 많이 가질수록 행복에 대한 기대가 늘어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예를 들어 한 번 고가의 명품을 구매한 사람은 같은 제품을 다시 사더라도 처음 느꼈던 정도의 행복을 얻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미 기대치가 높아져 더 좋은 제품을 원하게 되기 때문이다. 비싼 재화를 소비할수록 갈망은 더 커지고, 이렇게 커진 갈망은 우리가 일상의 작은 행복에 기뻐하는 능력을 마비시키게 된다(1).

(1) 2개의 연구 결과는 하나은행 1Q 블로그 포스트(2020.06.30)에 잘 정리되어 있어 그대로 인용했다.


두 연구 모두 같은 통찰을 준다. 행복의 역치는 가만히 두면 계속해서 높아지기 때문에 인위적인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소한 것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특정 행위(ex. 소비 활동)에 의존하지 말고 삶 속에 다양하고 재밌는 장치들을 심어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해, 도파민 설계도를 꾸준히 다시 그려야 한다.

높은 곳만 바라보고 사는 삶에서는 행복이 잘 유지되지 않는다. 더 올라서기 위해서는 큰 비용 투자가 필요한데 무상하게도 이런 행복은 올라서는 순간 휘발되는 경향이 있다. 앞서 '새삼스럽게 살기'를 '지속가능한 행복법'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대규모 자원을 동원해 삶에 큰 자극을 주지 않아도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다 가진 다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높이 올라가는 과정에서 주변을 돌아 보며 최소한의 행복을 어떻게 챙길 것인가를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말이 쉽지 새삼스럽게 사는 것은 벅찬 일이다.


첫번째 이유는, 우린 생각보다 생각하는 대로 사는 방식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은 생각'나'는 대로 살기 마련이다. 물 흐르듯 사는 인생에 벗어나 '생각'이라는 암초를 두고 사는 삶에 불편함을 느낄 수 밖에 없다.

두번째 이유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오롯이 혼자서 해내야 하는 영역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머리 속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현재 감정 상태가 어떤지 주변에 보여주기 어렵고 입으로 설명하기도 어렵다. 내 상태를 상대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조언이 힘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렇다면 이 어색하고 힘든 길은 주로 누가 걸을까? 행복이라는 친구의 변덕스러움에 질색하는 누군가다. 혹자는 이전보다 상황이 나아졌음에도 이유 모를 공허와 우울에 집어삼켜진 적이 있을 것이다. 또 다른 곳에는 정체 모를 이유로 행복 지수가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궁금하지만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사람들에게 '새삼스럽게 살기'는 좋은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삶이 무료한 누군가에게 나의 최근 도파민 설계도를 공개한다.




평소와 비슷한 일상을 다르게 바라보기

시점 전환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가 소중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하루들이 반복되면 소중함을 금세 잊는다. 당연시 하는 것이다. 익숙함에 속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상을 바라보는 시점을 전환하면 된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는 시점이 필요할 때가 있고, 낮은 곳에서 올려다보는 시점이 필요할 때도 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는 시점은 주로 자존감이 낮아질 때 필요하다. 위축된 자존감은 자신보다 나아 보이는 사람을 보는 횟수가 늘어날 때 주로 느껴지는 감정이다. 그러나 남들과의 차이가 스스로를 열등하게 인식하게 만든다면 먼저 짚어 봐야 하는 부분이 있다. 우선, 그것이 열등한 게 맞는지 분별해야 한다. 지금은 열등하다고 인식되는 것들이 상황이 바뀌면 우등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언젠가 평가가 달라질 수 있는 요소라면 '원래는 우등한 건데 당장 열등하게 보이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음으로, '열등한데, 뭐 어쩌라고요.'라며 스스로에게 반문할 수 있어야 한다. 뒤처짐에 위기감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생존 본능 때문인데, 몸에 느껴지는 신호가 항상 옳지만은 않다. 거짓 배고픔을 느껴 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몸에서 배고픈 신호에 모두 응답하지 않아도 우리는 건강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열등감에 모두 응답하지 않아도 된다. 열등하다는 것과 내게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당장 나에게 안 좋은 일이 발생하는 게 아니라면 방금 느껴진 열등감에 관심 주지 않아도 된다.

앞선 시도에도 불구하고 열등감으로부터 탈출할 수 없다면, 이때 필요한 것이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는 시점'이다. 우주적 존재로서 지구와 인간을 내려다 보는 방법이 대표적이다. 우주와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보다 보면 지구 밖 세계가 갖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광활함 속에 젖게 되는데, 이때 잠시나마 한 차원 높은 시선으로 지구라는 세계를 내려다 볼 수 있게 된다. 거대한 은하계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먼지보다 작은 크기의 지구에서 벌어지는 일에 일희일비 하는 인간이 그저 귀여울 뿐이다. 시점이 인간 사회에 머물러 있는 사람에겐 각 개인이 갖는 차이가 우주처럼 커 보이겠지만, 우주적 존재에 빙의하여 인간 사회를 바라보면 모두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점 전환을 연습하면서 나를 짓누르고 있는 것들이 과연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자신을 괴롭히는 열등감에 무안을 줄 수 있는 한 방을 만들어 보는 것이다.

낮은 곳에서 올려다보는 시점은 주로 따분함을 느낄 때 필요하다. 우리가 삶에 무료함을 느끼는 이유는 가진 것에 싫증이 났기 때문이다. 흔히 초심을 잃었다고 표현한다. 이때 우리는 지금보다 낮은 곳으로 내려가서 현재 갖고 있는 것들을 올려다볼 필요가 있다. 현재 본인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들을 처음 가졌을 때의 설렘을 기억해내야 한다.

초심의 본질은 동심이다. 무언가를 처음 대할 때는 늘 아이 같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새 핸드폰, 새 신발 샀을 때의 마음을 잊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 초심 찾기에 적응되면 아예 어린 시절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초등학생 시절을 생각해 보자. 어릴 때는 문방구에 들어설 때마다 설렘을 느꼈다. 맛있어 보이는 불량식품, 사용해 보고 싶은 문구류, 멋있는 장난감들이 나를 둘러 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경험해 보지 못했고 유추하기 힘든 세계들이 즐비했다. 아이의 시선에선 길거리 돌담 벽에 핀 민들레 꽃도 신기하고, 학교 앞에 놓인 육교의 생김새도 신기하다. 놀이터에서 만지는 흙의 촉감도 신기하고, 팔을 벌리고 서 있으면 날아 와서 앉는 잠자리도 신기하다. 낮은 곳에 올려다본다는 것은 모든 것을 신기해하는 아이의 시선으로 내가 이루어 놓은 것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줄곧 강조하겠지만 새삼스럽게 사는 데 있어 아이 같은 마음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니다. 방심과 사고로 언제든지 잃을 수 있는 것이다. 아이 같은 마음으로 내려앉아 새삼스럽게 자신이 가진 것들에 감사해하자.



풍선 같은 마음으로

살다보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인다. 이때 가벼운 존재감이라면 쉽게 벗어날 수 있다. 바닥에 놓인 풍선을 손으로 갑자기 누르려고 하면 압력을 조금 버티다 말고 옆으로 튕겨 나간다. 비슷한 원리다. 존재감이 가벼우면 상황에 짓눌리지 않을 수 있다.

존재감을 가볍게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주만큼 거대한 존재로 부풀려 보기도 하고, 먼지만큼 작은 존재가 될 때까지 부피감을 줄여 보기도 하면 된다. 쉽게 말하자면, 누군가 나의 존재에 감사해 한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우리 모두 하찮은 미물임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이 세상 단 한 사람에게라도 고마운 사람으로 역할 해 본 적이 있다면 자존감을 느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작은 존재감으로 각인되는 일, 적은 사람들에게 큰 존재로 남겨지는 일 모두 자신의 가치를 깨닫기 충분한 단서들이다. 이런 단서들이 없다면 그나마 자신을 이해해주는 가까운 사람에게 고마운 사람이 되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주변에 아껴주고 싶은 사람이 없다면 봉사활동 같은 불특정인을 위한 선행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타인을 아낌으로써 자신을 채울 수 있는 존재다.

사실 누군가를 위한 마음을 품는 것만으로 충만해진 경험은 대부분 해 봤을 가능성이 높다. 가장 단적인 예가 사랑이다. 심지어 짝사랑도 포함된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아이돌에 열심인 마음도 비슷한 심리일 테다. 아이돌은 자신을 아껴주는 수많은 팬 한명 한명의 실존을 체감할 수 없다. 한 인간이 수만 명의 자아를 동등하게 무거운 비중으로 자신 안에 저장하기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애정하는 상대가 자신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충분히 서운함을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여전히 떠올리는 이유는 자존감이 느껴져서다.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은 스스로를 조금 더 거대하게 인식할 수 있게 도와준다. 아이돌이 고마움을 느낄 수 있는 팬이 됨으로써 자신을 채우는 것도 우리가 자존감을 느끼며 사는 방식 중 하나이다.

다만 타인을 아낌으로써 스스로를 채워 나갈 때 주의할 점은 자기를 지키면서 상대에게 마음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마음을 나누어주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자신을 위해서다. 자신이 배제된 상태에서 남을 위한 마음만 안고 있으면 자존감은 오히려 더 낮아질 수 있다. 자신이 애정하는 사람이 원한다고 해서 간이든 쓸개든 갖다 바치지 말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는 친구들과 여행을 다녀오면 당시 기록했던 영상들을 편집해서 유튜브나 구글 드라이브로 공유한다. 금전적 보수 없이 친구의 결혼식 식중영상을 기꺼운 마음으로 만들어주기도 하고, 여행을 가고 싶은 친구들이 돈만 내면 각자의 니즈를 최대한 고려해서 계획을 짜오기도 한다. 모두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내가 어떤 모습인지 기록해 두고 싶어서, 직접 만든 영상이 친구의 인생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를 빛나게 장식할 수 있어서, 여행이 아름다우려면 함께 하는 모두가 즐거워야 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는 일이다. 쉽게 말해, '나'를 위한 일이다.


우리네 삶이 애초에 도토리 키재기라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자존감을 살릴 수 있다. 인간 세계를 기준으로 시야를 좁히면 작은 차이가 너무 크게 느껴지기 마련인데, 시선을 한 차원 밖으로 빼서 광활한 자연에 놓인 인간들, 좀 더 나아가서는 우주 속 지구라는 작은 별에 사는 개체라고 생각하면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을 좀 더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고민은 실제로 우릴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규모에 비해 너무 작고 귀여운 것들이다.

실제로 한날은 머리 속에 이것저것 잡다한 고민을 넣은 채 한강을 뛰었는데, 반환점을 돌아 집으로 걸어 오는 길에 시선 위로 반짝이는 별을 보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별은 여기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까?'
'저 별과 나 사이에 얼마나 큰 우주가 있을까?'
'그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내 안의 고민은 얼마나 더 작을까?'

마지막 문장을 속으로 내뱉고 나니 머리가 한 순간 깨끗해졌다. 누군가 머리를 꽉 쥐여오는 느낌이 금세 사라지고 아무렴 어떠냐는 마음이 새로 싹트기 시작했다. 우주 앞에서 한낱 미물인 사람들 사이에 끼어 스스로 작아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 차원 높은 시선으로 삶을 조망할 수 있다면 자신을 둘러 싸고 있는 관계로부터 좀 더 수월하게 독립할 수 있다. 외부의 요인이 나의 행복에 함부로 간섭할 수 없게 만들 수 있다. 바깥세상에 영향을 받지 않는 나만의 행복 공간을 만들어 놔야 한다.



아이 같은 마음으로

아이 같다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나보다 많은 사랑을 받는 친구를 질투하는 마음, 남보다 내가 먼저인 마음, 갖고 싶은 걸 손에 넣기 위해서 떼쓰는 마음 등 부정적인 모습들도 함께 담겨 있을 것이다. 그 와중에 내가 다루고 싶은 '아이'스러움은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개성과 순수한 호기심이다.

'가요이 키우기'라는 유명 커플 유튜브 채널의 이름이 지어진 이야기가 재밌다. 편집자인 남자친구는 출연자인 여자친구가 하늘을 보고 헤프게 웃거나 길 가는 강아지를 쫓아가는 등 아이 같은 모습을 보일 때 '가요이'라고 불렀고, 이 순간들을 모아 공유함으로써 사람들의 내면에 사소한 것들을 좋아하는 마음(가요이)을 키워 보자는 취지로 '가요이 키우기'라는 채널명이 탄생했다. 아이 같은 마음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그들은 행복 생산성이 뛰어난 사람들일 것이다.

어린 시절에 비해 지금의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거대하다. 해가 졌다는 이유로 더 놀고 싶은데 집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되고, 무언가 갖고 싶으면 부모님께 조를 필요 없이 직접 사면 된다. 가기 싫은 학원에 억지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 컨디션 관리를 위해 매일 같은 시간에 자야 하는 기계 같은 삶을 살지 않아도 되고, 공부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잊으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심지어 친구들과 밤새 수다를 떨어도 된다.

지금은 갑갑하다고 투덜대는 빌딩 숲도 서울에 갓 상경한 새내기에겐 고개를 아래로 떨구기 힘든 장관이었고, 이젠 너무 익숙해져 버린 대학교 공간도 한 때는 이십 대 청춘을 한껏 풍성하게 해주는 특별한 무대였다. 감칠맛 도는 주말을 뒤로 하고 사람들 사이에 끼여 이동하는 월요일 회사 출근길은 취준생 시절 간절히 고대하던 하루였다. 어느덧 조촐해져 버린 단아한 자취방도 냉난방이 안되는 옥탑방에서 살던 시절에 비하면 호텔이다. 치킨이 먹고 싶을 땐 친구들을 불러 모아 십시일반 할 필요 없이 침대에 누워 손가락 몇 번 튕기면 되고, 게임이 하고 싶을 땐 걸어서 20분씩 걸리는 PC방에 갈 필요 없이 방에 있는 컴퓨터를 키면 된다. 시작으로 돌아가서 올려다본 일상은 이렇게 감사할 것들 투성이다.

나이가 들면 아이처럼 웃게 되는 순간들이 적어지는 것 같다. 사회는 개인의 순수함보단 공동체의 이익에 관심 가질 수 밖에 없고, 사회에 어울려 살아야 하는 인간이라면 집단의 관심사를 개인의 기호 앞에 세울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개인이 사회에서 배척되지 않으려면 사회화라는 큰 흐름에 몸을 실어야 하는데, 이 급류에서는 남들이 웃을 때 웃고 남들이 울 때 울어야 한다. 내가 웃고 싶을 때 웃는 게 아니라, 웃어야 할 때 웃는 것이다. 자기다움을 소홀히 하면 사회의 흐름에 휩쓸려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정신을 차렸을 땐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뭍에 내팽개쳐져 있을 테다.

줄곧 아이 같은 마음이 사라지는 것에 조급함을 느끼던 내게 한날은 회사 동료가 이런 말을 했다.


평소에 ‘왜'라는 질문을 자주 하시잖아요?
문득 생각해보면 매번 이유를 궁금해하는 게, 마치 아이 같아요.

명치를 한 대 툭 맞은 기분이었다. 동심을 잃어 가고 있다며 낙담하고 있었는데, 매일의 습관 속에 아이스러움이 묻어 있었다는 걸 발견했을 때의 머쓱함은 나의 눈빛을 초롱하게 했다. 허투루 보지 않고 호기심을 갖는 마음, 다행히 아직 내 안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부터 눈앞의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가 궁금했던 나는 학교에서 질문을 참 많이 하는 학생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질문거리를 들고 쉬셔야 하는 선생님을 붙잡고 늘어졌던 탓에 기어이 교무실 문 앞에 ‘학생 출입 금지’가 붙었을 정도였다(1).

(1) 학생 출입 금지의 명분은 시험 기간이라 보안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지만.


매사에 ‘왜?’를 질문하는 이 버릇은 스스로를 지치게 만들었기 때문에 내다 버리려 부단히 노력했다. 헌데 그리 떨쳐내고 싶었던 마음이 나의 동심 중 하나라니. 섬뜩한 일이었다. 앞으로는 답을 찾는 과정을 느긋이 즐기려 한다. 너무 빨리 알아챌수록 재미가 덜하니까.




좋아하는 일상을 다른 방식으로 즐기기

다양한 상승감

좋아하는 일상을 찾는다는 것도 결국은 아이 같은 표정을 짓는 순간을 기억해 내는 것이다. 동심이라 해서 꼭 유년기의 마음을 말하는 게 아니다. 현재보다 어린 마음이면 충분하다. 어제의 마음이 오늘보단 동심이라고 말한다면 누군가 비웃을지 모르지만, 30년이 지나고 보면 지금의 마음 모두 동심으로 보일 것이다. 포인트는 실제 '아이였나'가 아니라, 마음이 얼마나 '아이 같았나'이다.

행복하려면 지반을 높여서 뛰는 게 아니라 낮은 지반에서 높게 뛰는 것이 중요하다. 트램펄린이 재밌는 이유는 단순히 높은 곳에 도달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밑에서 위로 튀어 올라 공중에서 잠시 머무는 맛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높은 곳에 머물 수 있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 재밌는 일이라면 고소공포증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많진 않았을 것이다. 인생에 상승감을 주려면 지반은 초심에 가까울수록 좋다. 초심을 어떻게 상기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어린 시절을 기억해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하루는 친구가 조카 이야기를 해주었다.


누나가 조카한테 그림책을 읽어주는데, 무당벌레가 나오는 구간을 너무 좋아해.


친구의 조카는 무당벌레를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고, 무당벌레의 색감을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호감이기에 조카의 소중한 동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다음에 친구의 조카가 성인이 될 무렵, 무당벌레를 여전히 좋아하는지 물어보고 싶다. 만약 벌레를 싫어한다고 답한다면, 어릴 때 무당벌레를 좋아했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행복의 실마리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같은 순간을 찾았다면 잘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때 뭐가 그렇게 좋았는지 혹은 그때와 지금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현재 삶의 반경에 좋아하는 것들을 추가하거나, 나를 갉아먹는 것들을 제거해야 한다. 앞선 과정을 반복하면서 스스로 아이처럼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나는 작은 도시에서 자라 그런지 탁 트인 시야와 울창한 나무를 좋아한다. 고향 집 현관문을 나서면 주변 산에서 내려온 것 같은 공기가 코털을 간지럽히며 몸 안으로 들어 왔고, 여유로운 간격으로 배치된 낮은 건물들 위로 보이는 하늘은 청소년기를 몽글하게 했다. 하지만 강남 도시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서울 사람의 삶에는 무미건조한 공기와 좁은 시야, 어쩔 수 없이 들어선 나무들이 있다. 정형화된 공간은 금방 싫증을 만들고, 자주 찾아오는 권태는 새삼스러움을 자주 필요로 한다. 고향 흉내라도 내야겠다는 생각에 주말이면 집에서 글을 쓰지 않고 울창한 나무가 보이거나 시야가 탁 트인 복층 카페에 가서 작업을 한다. 행위는 같고 공간만 달리했을 뿐인데, 몰입하는 수준이나 작업의 재미에 큰 변화가 생긴다.

환경을 바꾸기 어려우면 그 환경 아래서 다른 방식으로 삶을 즐기면 된다. 진짜 고수들은 같은 것을 수많은 방법으로 즐길 줄 안다. 초보는 에피소드 게임을 한 번 깨면 다시 하지 않는 반면, 고수는 다른 방식으로 여러 번 더 플레이 해보기도 한다. 초보는 라면을 매번 같은 방식으로 끓여 먹지만, 고수는 다시마, 무, 멸치를 넣어 라면 끓일 물을 미리 우려내거나 파, 꽃게를 넣어 풍미를 더하는 정성을 보인다.

더 많이 먹었다간 돌이킬 수 없는 배를 가지게 될까 두려워서 식사량을 늘리지 않고 더 즐겁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 고민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이 고민은 우연히 보게 된 하나의 영상으로 해소되었다. 식사를 하면서 유튜브를 보던 도중 우연히 피드에 '오늘의 주우재'라는 채널에서 제작한 '개노맛 먹방'이라는 영상 콘텐츠가 떴는데, 악동 뮤지션 수현 님이 게스트로 나온 것 같아 썸네일을 클릭하게 되었다. 수현 님이 직접 음식을 맛있게 먹는 방법을 알려 주셨는데, 방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눈으로 먹기

코로 먹기

입으로 먹기

먹고 나서 표현하기

다 먹은 다음에 박수치기


실제로 돼지 두루치기를 먹으면서 따라 해 봤는데, 더 맛있었다. 진짜다. 분명 같은 환경 속에서 같은 음식을 먹는 것인데도 다른 방식으로 즐겼더니 재밌고 맛있었다. 특히, 마지막에 "아 맛있었다!" 하면서 혼자 박수를 쳤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웃기던지 웃음이 터져 나왔고, 그날의 식사 시간이 나에게 꽤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았다.




어릴 때부터 스포츠를 좋아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몸과 마음이 무거워지니 자연스레 하는 쪽 보단 보는 쪽으로 스포츠를 즐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매번 침대에 누워서 보는 경기는 직접 하는 것보단 확실히 재미가 덜했다. 마침 이 글을 쓰고 있던 시기에 롤드컵(1)과 축구 월드컵이 있었는데,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즐겨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엔 게임 경기를 보면서 특정 팀을 응원한 적이 없었는데, 이참에 하나 정해 보기로 했다. 내 마음을 베팅하기로 한 '팀 DRX'는 당시 파란만장한 서사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월즈 선발전 막차에 탑승하더니 앞에 놓인 세계 각국의 강팀을 하나하나 잡는 이변을 만들었고, 결국엔 페이커 선수가 소속된 SKT T1과 마지막 결승전을 남겨 둔 상태에 이르렀다.

응원팀이 정해졌으니 유니폼을 사 입으면 기분을 좀 더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으나, 경기가 하루 남은 시점이라 낙담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응원팀이 생겼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생색내고 싶었기 때문에 주변 마트에서 하림 용가리 치킨(2)을 시켜 버렸다.

어거지로 응원 팀과의 연결점을 만들어 놓고는 다음 날 아침에 의기양양하게 일어나서 치킨을 에어프라이어에 돌리고 모닝커피를 마시며 경기를 봤다. 확실히 응원하는 팀이 있으니 지루한 구간이 없었고, 아무런 격돌이 일어나지 않아도(3) 흥미진진했다. 결국 경기는 내가 응원했던 팀이 우승했는데, 입을 틀어막고 마지막 경기를 지켜봤던 기억이 난다. 그냥 응원 팀이 하나 생겼을 뿐인데, 좋아하는 것에 몰입하는 수준이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1) 라이엇 게임즈가 주최하는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게임 대회의 비공식 명칭이다. 각 국가별 리그에서 상위권을 차지한 팀들이 선발되어 해당 시즌의 세계 최강팀을 가리는 대회이다.
(2) 용은 DRX(Drangon X)를 상징하기 때문에 용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당시 내가 주변에서 제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게 B마트에서 시킨 용가리 치킨이었다.
(3) 게임 특성상 캐릭터가 강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시간('라인전'이라고 부름)이 있고, 이 때 싸움이 잘 일어나지 않아 지루함이 생기는 구간이다.


카타르 월드컵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축구 경기는 주로 집에서 혼자 치맥 하며 보는 편인데, 롤드컵 때 경험했던 게 우연이 아닌지 한 번 더 실험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친구들과의 단톡방에서 함께 볼 사람들을 모집했고, 다들 직장인임에도 바쁜 시간을 빼서 어렵사리 모였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약속 날짜가 다가오는 기간에는 이따금 한 번씩 기대감이라는 게 생겨 마음을 간지럽혔고, 친구 집에 모이기로 한 날 당일엔 퇴근 후 부랴부랴 지하철을 갈아 타며 손에 쥔 핸드폰으로 친구들과 무얼 먹을지 이야기하는 것도 참 설레었다. 결혼한 친구의 형수 머리카락이 짧아진 것을 못 알아 차려 난처한 표정을 지었던 순간도, 같은 대학 축구팀에 몸담았던 친구들과 함께 아는 체 하며 경기의 포인트를 짚어 주던 순간들도 참 재미있었다.

축구 경기는 무승부였지만, 개인적으로는 승리한 날이었다. '새삼스럽게 살기'라는 가설을 몸소 증명한 날이기 때문이다. 같은 것을 하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즐기면 행복의 밀도가 달라진다는 것을 여러분도 체감할 수 있길 바란다.




에필로그

여행하듯 살기


행복은 흔들리는 촛불 같다. 밝아진 시야와 따뜻한 온기에 너무 신난 나머지 몸을 가누지 못하면 홧김에 밀려가는 공기에 금세 자취를 감춰 버린다. '새삼스럽게 살기'는 함부로 꺼진 불씨를 다시 살리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다.

'새삼스럽게 살기'를 잘 하려면 생각하는 대로 사는 연습을 시작해야 한다. 생각하는 대로 살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삶을 기록하는 것이다. 짧게 끄적인 포스트잇 메모도 좋고, 내일 읽으면 부끄러울 일기도 좋다. 각자의 방식으로 저마다의 생각과 감정의 이유를 찾아 헤매 보길 권한다.

이실직고하자면 글쓴이도 평소엔 생각나는 대로 사는 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기록하며 사는 시즌에 유독 삶의 방향성이 좋음을 느낀다는 것이다. 바빠서 글 쓰는 일을 못하다 보면, 생각이 사는 그대로를 따라가는 현상을 자주 접한다. 그래서 조금 귀찮더라도 틈을 내어 몇 자 적어내려 애쓴다.

에세이는 우리가 더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공유하는 장르고, 에세이스트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작가 자신이 살아 온 삶을 증거로 제시하는 사람이다. 다른 말로 하면, 여기에 적힌 내용은 작가에게만 정답일 수 있다는 뜻이며 다른 이에겐 충분히 오답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마음에 분명 작은 씨앗이 될 것이라 믿으며 사유의 결과를 글로 옮겨 본다.

기록하는 취미는 이번에도 나에게 좋은 선물을 안겨 주었다. 기록은 삶의 농도를 높이는 동시에 무게는 가볍게 하는 일이다. 적어둔 채 그곳에 남겨두고 가면 되기 때문이다. 기억이 안 날 때, 다시금 무거워져야 할 때 그때 돌아와서 꺼내 먹으면 된다. 남들 보이지 않게 치열했던 순간들의 잔열이 채 식기도 전에 얼른 메모장에 담아 보관했던 나의 감각들을 이렇게 또 여러분 앞에 부끄러이 내놓는다.

새삼스럽게 사는 것은 습관으로 만들기 힘든 생활 방식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감정에 매몰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내용을 이해하고 있어도 실제 해보면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 각자의 방법론을 몸에 익히는 것은 오랜 시간 반복된 훈련이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이 훈련은 감정의 힘을 줄여야지만 지속할 수 있다.

우리는 관성처럼 어제의 행복과 오늘의 행복을 비교한다. 하지만 새삼스럽게 살면 더 이상 비교할 수 없게 된다. 다른 종류의 하루니까. 이 연습 끝에는 인생에 대한 관점 전환이 있다. 주어진 하루를 여행하고 있다는 환상이 이 글을 읽는 누군가의 마음에 싹을 틔웠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