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집은 용산구 산천동 언덕 위 아파트였다. 나는 퇴근길 야채 트럭에서 장을 보곤 했는데 그날은 국에 넣을 대파가 필요했다. 손이 작은 새댁이었던 나는 대파 한단 앞에서 망설였다. 100원어치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아저씨는 열심히 사는 새댁이라며 대파 한 잎을 딱 내 손가락만큼 톡 따 주었다. 남편은 대파 한조각을 사는 사람과 그림을 사는 사람이 동일 인물일 수 있나 싶어 혼란스러워했다. 경제학을 전공한 남편과 예술학을 전공한 나는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르다. 같은 지역을 놓고도 나는 어떤 갤러리, 문화공간이 있는 동네로 인식하는데 남편은 어느 기업 사옥이 새로 옮긴 동네로 인식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다른 필터를 끼고 세상을 인식하고 그만큼 서로 다르지만, 다행히도 울퉁불퉁한 톱니처럼 조응하며 살아왔다. 그렇지만 서로 닮아가는 것이 부부라더니, 남편이 변했다. 몇 년 전이었는데 회사에 간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울옥션에 도윤희 작가 그림이 나와 있어. 좋아하는 도작가님 그림이 경매에 나오다니 놀라운데, 오, 이거 생각보다 가격도 나쁘지 않아! 그런데 내일이 경매일이야. 작품에 훼손이 있어 확인이 필요하다는 문구가 있는데, 지금 빨리 서울옥션 전시장에 손상 상태 좀 확인하러 갈 수 있어?”
2003년 KBS 디지털미술관 프로그램을 만들 때 도윤희 작가를 취재했던 인연으로 작가를 알게 된 후, 나는 도윤희 작가의 팬이 되었다. 결혼 전 남편과 미술관 데이트를 자주 했는데 도윤희의 전시에 갔다가, 작품 속으로 마구 빨려들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작가의 작업실에 방문한 경험까지 더해져 남편에게도 도윤희 작가는 단단히 각인되었던 것이었다.
도윤희(b.1961)는 40년 넘게 자연의 원형, 생명의 이미지를 추상회화로 표현해 온 작가이다. 작가는 물감과 연필로 작품의 층을 쌓을 때마다 바니쉬(barnish)를 칠해 화면의 깊이를 만든다. 이미 지나간 것, 지금 생겨난 것을 차곡차곡 쌓으며 생성과 소멸, 존재를 표현한다. 정물화로 유명한 한국의 1세대 서양화가 도상봉의 손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성신여대 서양화과 교수로 재직했고, 독일과 서울을 오가며 작업하고 있다.
옥션에 나온 작품은 세포와 화석의 단면 등 보이지 않는 세계와 시간성에 집중한 초기작 ‘존재 Being’ 연작 중 하나로 2000년 작품 <존재-늪 Being-Swamp>였다. 무수한 붓질이 조화롭게 쌓여 반짝이듯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품으로 마침 좋아하는 시리즈 중 하나였기 때문에 더욱 반가웠다.
내일이 경매라니 시간이 빠듯하게 느껴져 택시를 타고 평창동 서울옥션으로 이동했다. 남편에게 작품 살 돈은 있냐고 물었다.
“그건 걱정 마, 우리에겐 마통이 있잖아!”
마통이 뭔지도 몰랐던 나는 뭔가 대책이 있다는 줄 알고 너무 다행이라고 응수했다. 도착하자마자 직원의 안내로 수장고로 갔다. 역시나 작품에 이슈가 있었다. 기업 소장품이었는데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작품에 손상이 가 있었다. 그림은 오랫동안 창고에 방치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최소한의 보호장치 없이 다른 액자를 겹쳐 세워 두었는지 화면의 물감이 여러 군데 움푹움푹 패여 있었다. 안타까운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 상처들은 너무나 명백했다.
훼손된 그림 앞에서 고민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사는 동안에 도윤희 작가의 작품을 소장할 수 있다면, 이번이 다시 없을 기회였다. 생각보다 상태가 온전치 않았지만, 한편 그래서 더 마음이 갔다. 마치 주인에게 버림받고 병든 고양이 같았다. 우리는 입양을 결정했다. 그리고 수리복원가를 수소문해 수리를 맡겼다. 이미 도윤희 작가의 작품을 수복한 경험이 있고, 이중섭의 그림도 복원한 적이 있는 손꼽히는 복원가였으므로 믿고 작품을 맡겼다.
미술품 보존과 복원은 미술계에서는 매우 중요한 이슈이다. 많은 이들이 문화재 복원은 쉽게 떠올리지만, 기껏 백년 안팎의 현대미술 작품에 무슨 수리가 필요하냐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미술이야말로 보존 수복의 이슈가 따라다닌다. 문화재 같은 유물들의 재질은 금속이나 도자기(1400도가 넘게 구워진 세라믹은 결국 돌인 셈이다), 땅속에서 몇 백년, 천년을 견딘 재질이다. 그러나 현대미술의 재료는 너무나 다양하다. 게다가 작가들은 보존이 확실한 재료들만 골라 쓰는 것이 아니라 ‘표현’을 위해 자유롭게 제작하다보니 정체불명의 ‘믹스드 미디어(Mixed Media)’ 앞에서 수복전문가들의 고민이 수렁에 빠지기도 한다.
험난한 과정을 거치고 돌고 돌아 도윤희의 1999년 작 <Being-Swamp>가 드디어 우리 집으로 왔다. 수리상태도 양호했다. 가로 2미터의 그림을 걸기 위해 거실의 책장을 가로로 절반 덜어냈고 작품 수리비까지 모두 지불했다. 그리고 나니, 새삼 돈의 출처가 뭐였는지 궁금해 다시 물었다.
“마통이라고 했잖아. 마이너스 통장!”
“뭐라고? 빚을 냈단 말이에요? 마통이 그런 뜻이었어? 부창부수라지만, 아이고, 여보!”
우리는 한동안 새로운 겨울 외투 따위는 살 수 없었다. 옷 소매 끝이 헤졌지만 우리를 위로하듯 한동안 빈티지 패션이 유행해서 다행이었다. 그림을 보고 뿌듯해하는 남편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가 이 세계에 들어왔다.
* 작품을 보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벽에 걸어두는 것이다. 그리고 작품도 사람과 똑같다. 물리적인 충격 방지는 물론, 적절한 온습도, 자외선, 그리고 통풍을 신경 써야 한다. 중성지 종이상자나 나무 상자에 넣어 보관하는 것이 좋지만 최소한 뽁뽁이 포장지라도 싸서 보관해야 한다. 철이 바뀌면 작품이 시간을 잘 견디고 있는지 한번씩 눈으로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 아이를 키우는 생활인이 되고 나서보니 사람과 그림의 환경은 놀랄 만큼 서로 닮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