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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언덕 Mar 28. 2024

서걱이며 걷는 밤

가끔 예술가의 작업을 들여다보다보면 마치 '비밀의 화원'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원사이기도 한 모든 아티스트는 자신만의 이야기와 색채와 형태로 각자의 정원을 가꾸고 있고, 그들은 위대하고도 외로운 창조자처럼 느껴진다. 비밀의 화원은 열쇠가 없어도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덩굴을 헤치고 입구의 문을 찾아야 하는 노고와 두려움 없이 발을 내딛는 용기 정도는 필요하다. 새로운 정원을 거니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때로는 큰 감흥 없이 정처 없이 헤매다 끝나는 산책이 될 수도 있지만, 일상의 루틴을 벗어난 산책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하다. 예기치 않게 감탄이 터져나오는 새로운 것들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림을 마주하다 보면 그림의 세계가 우리를 새로운 곳으로 인도하기도 한다. 


하우스갤러리2303의 여섯 번째 전시는 작가 이고운(b.1979)의 비밀의 화원 속으로 들어가는 산책으로 기획한 전시였다. 2022년 2월 늦겨울과 초봄 사이 어느 날,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을 당시 작가는 네 살 쌍둥이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유학 후 박사까지 마쳤고 7번의 개인전으로 중견 작가의 탄탄한 필모를 쌓았으나, 소소한 그룹전을 제외하고 몇 년간 전시다운 전시는 멈춰있었다. 작업실에는 지난 20년 간의 작품들이 쌓여있었고 한켠에는 현재 진행형의 그림들 몇 점과 마른 물감이 자리해 있었다. 하루에 한시간이라도 그림을 그리려 하지만 붓을 들 수 없는 날도 많다고 했다. 작가로서 자신의 세계를 지키려 애쓰고 있는 모습이 작업실 곳곳에 역력했고 고군분투 중인 그녀의 모습이 나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나는 작업실의 작품들 사이를 걸어다녔다. 보통의 개인전은 새로운 신작을 발표하는 형식이지만, 전시를 채울 신작 리스트를 충분히 확보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작가의 작품 전반을 소개하는 편집 전시로 만들어보자고 했다. 작가의 삶의 파고와 작업 시기에 따라 여러 변화를 지켜보는 것이 오히려 흥미로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전시를 할 가을까지 6~7개월 정도 시간이 있으니, 가능하면 몇 작품이라도 신작이 나오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전시장이 집이라는 공간이니 작은 그림도 좋다고 덧붙였다. 왠지 서로 비슷한 처지의 작가와 기획자는 그렇게 전시 준비를 시작했다. 


이고운 작가의 박사 논문을 읽으며 그림들을 마주하고 있던 밤, 어느 순간 내 귀에서 '서걱서걱'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내가 그림 속 인물처럼 작가의 어슴푸레한 밤의 정원에 들어가 수풀을 헤치며 걷고 있었던 것이었다. 온 몸의 세포가 깨어나 공감각적으로 작가의 그림세계가 나에게 들어왔다. 전율이 일었다. 한참을 서걱이며 걷다보니 곧 아침 해가 떴다. 나는 작가에게 연락해 '서걱이며 걷는 밤 산책'을 전시 제목으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작가는 '걷는'과 '산책'이 중복되니 '산책'을 빼도 좋겠다고 했다. 머리를 맞대니 역시 좋다. 그렇게 '서걱이며 걷는 밤'의 전시 제목이 정해졌다. 

이고운, <꿈 속의 정원>, 캔버스에 아크릴, 100x100cm, 2015


이고운은 장지와 캔버스를 넘나들며 치유의 이상향에 대한 은유를 표현해 왔다. 작가가 빚어낸 예술세계는 밤의 시간에 머물러 있다. 낮의 시간은 강한 햇빛 아래 모든 것이 명확하고 고정된 의미로 식별되는 시각적인 시간이라면, 밤의 시간은 모든 대상들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감촉과 소리로 더듬는 촉각적 시간이다. 작가는 그 모호한 밤의 시간대에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밤이지만 완전히 깜깜하지 않고 적당한 달빛과 별빛이 있어 우리는 천천히 서걱이며 작품 속을 걷기 충분하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따듯함(warmness)’은 작가의 작업 전반이 향하는 방향이다. 그림에서 읽히는 색채의 분위기, 부드러움, 반짝임, 서정성, 동화적 상상, 때때로 사랑스러움 등은 결국 작가를 포함해 그림을 보는 이에게 따듯하고 포근한 정서적 교감을 건넨다. 


작가의 주요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미국 유학 시절 시작된 ‘구름나무’와 작가의 심리적 풍경을 투영한 ‘이상정원’ 등 주요 작품들과 함께, 힘든 육아의 순간 자신을 위로하듯 그린 그림들 몇 점과 하우스갤러리2303 전시를 위해 준비한 신작들까지 스물세점의 그림이 집으로 왔다. 작가는 2015년 박사 논문을 마치고 출산과 육아의 시간을 거치며, 절대적인 작업시간이 줄어든 만큼, 작업에 대한 열정으로 작업의 밀도를 높였다. 2022년 신작으로 태어난 이상정원은 이전과는 또 달라진 분위기로 더 한층 밝고 부드럽게 다가왔다. 작가의 새로운 삶의 일면이 작업으로 스며든 흔적 또한 살펴볼 수 있다. 토마스와 기차들, 러버덕, 플레이모빌처럼 작가의 삶을 둘러싼 새로운 오브제가 그림에 속속 등장하기도 한다. 작가의 사는 모습이 그림에 투영되는 것이 나는 좋았다. 


이고운, <빗 속의 12살 제임스>, 장지에 연필과 과슈, 지름 40cm, 2022 


이고운 작가의 전시는 성공적이었다. 그림은 집에 걸리자 더 빛이 났고, 작품과 공간도 더 없이 잘 어울렸다. 그리고 기대 이상으로 많은 그림이 자신의 집을 찾아갔다. 숲에 앉아 쉬고있는 새처럼 지친 내 마음도 내려놓고 싶다는 관객도 있었고,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자 인생 첫 그림이라며 만기된 적금으로 그림을 데려간 이도 있었다. 2교대 근무로 혼자 잠드는 딸아이가 안쓰러워 회사를 그만두고 이제 마침내 '집으로' 가게되었다는 또다른 여성관객은 집으로 가는 길의 <핑크뮬리 밤>을 걸고 새로운 자신의 삶을 기념하고 싶다고 했다. 쌍둥이 아들딸을 위해 공주오르골과 왕자오르골 그림을 데려간 엄마도 있었다. 수많은 그림이 또다른 이야기를 덧입고 자신의 집으로 안착하는 모습은 작가에게도 나에게도 감동의 순간으로 기억되었다.   


[좌] 이고운, <동백 20-1>, 캔버스에 아크릴, 22x16cm,  2020 / [우] <부드러운 정원>, 캔버스에 아크릴, 80x80cm, 2022


"작가 이고운이 가꿔온 밤의 정원으로, 경계 없이 우리를 감싸는 밤 산책을 나서보자. 쏟아지는 별을 주우며 서걱서걱 걸어보자. 상징과 은유로 가득한 작가의 그림 속을 우리는 새로운 관점으로 거닐어도 좋을 것이다."


전시를 소개하는 말미에 썼던 이 문구를 작가는 마음에 들어했다. 하갤의 전시가 끝나고 곧이어 열린 쉐마미술관의 이고운 개인전에서는 그 문구에 화답하듯, 밤의 정원 안에 하늘에서 쏟아진 별들이 여기저기 툭툭 떨어져 있었다. 바라보고 있으니 미소가 피어나는 동시에 눈물이 차 올랐다. 작가도 나도 이렇게 한 걸음 더 나아간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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