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왜 거기서 나오세요?
-선생님이 왜 거기서 나오세요?
1200여 명 학생과 100여 명 교직원이 60분 안에 작은 규모의 급식실에서 점심을 먹는다는 것은 밥먹는 것이 흡사 전쟁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인근에서 인정받은 급식 맛집이지만 한꺼번에 수백 개의 수저가 수백 개의 식판을 긁으면서 만들어내는 쇳소리가 엉켜 부딪히면 맛을 즐기며 식사하려는 의도는 사치스럽다.
그저 우걱우걱 먹는 행동을 하기 바쁘다.
게다가 입장을 못하고 기다리는 인원을 생각하면 괜히 눈칫밥이다.
어수선함에 쫓기고 허기에 밀려 허겁지겁 먹게 되는 점심.
엉겁결에 식판을 비우고 나서야 빡빡한 공간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급식실 동선은 공간의 혼잡을 줄이기 위해 입구는 학교 건물과 이어져있고 출구는 입구의 반대편 즉, 건물 밖으로 나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렇게 식사 후 제법 두꺼운 철문을 열면 출근 후 처음으로 야외로 나오게 된다.
급식을 먹고 나온 다음에야 오늘 날씨의 TPO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날의 날씨는 완벽한 TPO를 갖춘 날이었다.
파란 하늘에 몽실몽실한 구름 몇 점, 봄날의 온기를 품은 기온, 물기 없이 뽀송뽀송한 습도, 새싹 돋는 나뭇가지가 살랑일 정도의 바람까지
그렇게 모든 것이 완벽했다.
실내에서 야외로 나오면서 갑자기 늘어난 햇빛에 놀란 동공을 위해 손바닥을 눈썹 위에 펼쳐 올려 좁은 그늘을 만들어줬다.
그랬더니 시야가 확보되면서 바로 앞 주차장에 어떤 차 한 대가 보였다.
주차장 모서리에 검은색 차
상당히 어정쩡한 상태의 차.
앞에 있는 흰 SUB차량에 막혀서 나오지 못하고 중도 포기한 걸까?
아니면 흰 SUB가 먼저 주차되어 있는 상태에서 구석 빈 공간에 주차하려다가 궁디만 넣다가 멈춘 걸까?
흰 색 선 안, 한 칸에 한 대씩이라는 주차장의 질서를 파괴한 검은색 차량의 신선한 시도에 느닷없이 웃음이 새어 나와서는 멈춰지지 않았다.
그날은 점심 먹고 교문지도가 바로 이어지는 날이었다.
검은색 차가 잘 보이는 명당 위치에 자리 잡고 교문 지도를 시작했다.
적당히 볕을 받으며 광합성을 했고, 고개를 돌리다가 다시 검은색 차가 보이면 웃음버튼이 눌려 깔깔댔다.
급식 먹고 나오는 아이들을 붙잡아 수다를 떨어가며 그렇게 즐겁게 점심시간이 흘렀다.
그 시각,
웃음버튼의 차량 주인은 낯선 교무실에서 책상 정리 중이었다.
딱 4일간만 급하게 수업을 대신해 줄 시간 강사가 필요하다는 말에 바쁜 시간을 겨우 비워 출근한 것이다.
학교는 짧은 기간 쓰라고 몹시 낡은 노트북 한대를 내어주었다.
먼지를 털어내고 전원을 연결했다.
전기가 통하자 낡은 노트북은 연식 만큼이나 아주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헌데 겨울잠에서 깨어난 노트북은 전에 사용하던 사람의 흔적이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본래 사용하던 노트북을 반납하면 포맷이 원칙이건만 어찌하여 이 녀석에게는 적용되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차주는 찬찬히 바탕화면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생각지 못한 사람을 떠올리게 된 것은 이들의 오랜 인연 덕분일 것이다.
바탕화면에 몇 개의 바로가기 폴더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순서대로 [한국지리], [여행지리], [통합사회], [수업계]였다.
연이어 '지리'라는 이름의 교과목을 가르친 것으로 보아 전공이 지리과인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 학교에서 수업계 역할을 맡았던 모양이다.
마지막 결정적 흔적.
sunhwa's Chrome
굳이 브라우저에 본인 이름까지 박아놓은 (나도 모르겠다. 왜 이렇게 바뀌어 있었는지) 친절 덕분에 검은색 차량의 차주는 흐릿한 의심을 곧바로 확실한 사실로 굳힐 수 있었다.
'여기 있었구나'
차주는 곧바로 이전 노트북의 주인을 찾기 위해 일어섰다.
교문 지도를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다른 교무실 선생님께서 몇 가지를 확인하고는 곧바로 필요한 것을 찾으려 내려오신다고 해서 양치를 미뤄야 했다.
찾으시던 과년도 서류 몇 가지를 추려서 내어드리고 나니 이번에는 부장님이 몇 가지를 물어오셨다.
보름 있으면 시작되는 교육실습생 (보통 교생이라 한다)과 관련해서 조율해야 할 몇 가지를 체크하신 것.
점심을 먹은 지 한참이 지났는데 하염없이 내 양치 시간이 미뤄지고 있었다.
드디어 식사 후 1시간이 지나서야 칫솔에 치약을 묻혀 양치를 하러 교무실을 나섰는데 그곳에 느닷없는 조우가 성사됐다.
하루 총량을 넘어서는 웃음을 선사해 준 검은색 차주와 마주한 것이다.
선생님이 왜 거기서 나오세요?
26년 전 내 고3 담임선생님.
내게 지리라는 과목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알게 해 주신 분.
덕분에 나는 선생님과 같은 대학교 지리교육과에 진학해서 내 직속 선배님이시기도 하다.
둘째를 출산하지 얼마 안돼 스승의 날 찾아뵀을 때 그래도 저녁에는 쌀쌀한데 얇게 입고 왔다며 본인의 스카프를 내 목에 감아주시던, 늘 베풀어주시는 은사님이 갑자기 우리 학교에 계신 것.
고등학교를 졸업 후에도 해를 걸러서라도 꾸준히 찾아뵈었었으나 최근 4-5년 정도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일, 육아, 글쓰기, 출판 등으로 이어지는 일상의 분주함이 핑곗거리였다.
하지만 진심으로 늘 마음 한켠에 '연락을 드려야 하는데' 빚진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세월을 헤아려보면 그 사이 퇴직을 하셨을텐데 챙기지 못한 마음이 늘 죄송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그것도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선생님과 마주친 것.
자초지종을 맞춰보니 첫아이 탄생을 준비하는 진로 부장님의 빈자리에 좀 와주십사 부탁을 받고 오시게 되었다는 것.
노트북을 보고 이전 주인이 나라는 것을 직감하시고는 찾아 오시던 길에 딱 마주친 것이다.
선생님과 복도에서 마주친 그 순간.
난 곧바로 내 나이에서 절반 이상을 소멸시켜 버렸다.
마흔 중반의 21년차 교사가 아니라 그저 선생님 곁에 여고생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산적한 근황토크를 하며 자연스럽게 선생님을 따라 걷다 보니 학교 건물을 벗어나고 있었다.
내가 차를 급하게 대고 와서
지금은 옮길 수 있나 확인해 보려고
점심시간 내내 나를 박장대소하게 만든 검은색 차가 바로 선생님 차였다니.
시간 강사로 와주신 것이라 수업 시간에 맞춰 남보다 늦게 출근했더니 주차 자리가 없으셨단다.
그래서 주차를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그냥 교무실로 올라가셨다는 선생님.
뵙기 전에 이미 선생님을 알아본 것은 아닌지 신기한 순간이었다.
차를 옮길 수 없다는 걸 확인하고 다시 선생님의 교무실로 따라 올라갔다.
켜놓은 노트북을 보여주시며 이전에 내가 쓰던 것을 받으셔서 놀라셨다는 말씀에 내가 더 놀랐다.
(포맷시키지 않은 것에 한번 더 놀랐음은 숨겼다)
특히 내 이름으로 바꿔놓은 브라우저가 있어서 확신이 들어 반가우셨다니 새삼 우리 둘의 인연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근황토크를 이어가며 작년에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말씀드렸다.
그리고 빠르게 블로그를 열어 그간 이곳에 글을 써왔고 그것이 책이 되었다고 조잘조잘 선생님께 자랑을 늘어놓았다.
근데 이건 뭐니?
블로그 페이지를 펼쳐 보이 드리고 있는데 블로그 필명을 보고 무엇이냐 물으셨다.
"아, 그게요. 블로그 하려는데 별명처럼 필명을 쓰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커피 중에 코케허니를 좋아하고, 마침 마시고 있었던 터라 그냥 코케허니 + 제이름 유선생 = 그래서 코케허니 유선생 이라고 좀 생각 없이 적었어요. 하하하"
너스레를 떨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주섬주섬 가방을 열어 내게 보여주신 것이 있었으니 바로 코케허니 드립백.
선생님께서도 코케허니 커피를 즐기고 계셨던 것.
사실 커피 좋아하는 사람들도 에티오피아 코케허니는 잘 모른다.
그래서 내 필명을 설명해도 보통은 다들 낯설어하는데 선생님은 평소에도 코케허니를 즐기고 계셨단다.
이처럼 완벽한 찌찌봉이 어디 있단 말인가.
우연이 거듭 겹쳐지자 온몸에 냉기가 휘감기듯 전율이 느껴지며 소름이 돋아났다.
역시 역시 우리 선생님
♡
그렇게 며칠은 다시 고등학생된 기분이었다.
오전에 잠시 들러 문안 인사를 드리고, 교실에서 내려오는 길에 또 빼꼼 고개만 디밀고 눈인사를 남기고 돌아서기도 했다.
40대 중반, 21년 차 교사는 그녀 앞에서 그저 교복 입은 아이처럼 수다스럽게 떠들고 싶어졌다.
선생님이 가시던 날 바쁘다는 핑계로 가시는 길을 배웅하지 못했다.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이미 우리 교무실에도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고 선생님 또한 바쁜 나를 귀찮게 하지 않으시려고 조용히 퇴근하신 후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친구들과 함께 뵙기로 미리 날을 잡아놓은 상태라 조금 덜 아쉬웠다.
스승의 날이 다가온다.
5월 15일은 본디 세종대왕의 탄실일이라 그날을 스승의 날로 정했다고 한다.
헌데 난 교사가 된 시점부터 지금껏 스승의 날이 불편했다.
애매한 학기 초 5월을 스승의 날이라 정해놓으니 아이들은 고마움보다 의무감이 앞설 것이다.
교사인 자로서 챙김을 받자니 그리 대단하지 않은지라 민망하기 짝이 없는 날이라 늘 거북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니 받기 위해 존재하는 날이 아니라 챙겨드리기 위해 존재하는 날이라는 것을 잊었었다.
스승의 날, 내 스승님을 뵈야겠다.
앞으로는 더 자주 연락도 드려야겠다.
진정한 나의 선생님.
은사님.
강효자 선생님 ♡
제목사진출처:무한도전'거인의유혹'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