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21년간 한 회사에서 근무했다니!
회사에서 근속휴가(勤續休暇)가 주어지는데,
입사(入社) 20주년(周年)의 경우,
20주년이 시작되는 날부터 1년간,
무려 연속 5일을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규정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경우에는 작년 이맘때부터 올해 오늘까지
딱 1년의 기간 중 연속해서 5일간! 휴가를 쓰지 않으면
이 휴가는 그냥 소멸(消滅)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결국, 휴가사용 마감에 임박해서
가까스로 휴가를 쓰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작년 여름휴가 때 휴가를 이어서
워킹 데이(Working Day) 기준으로 총 10일을
쓰려했었는데요. (주말 포함 시 실사용은 2주)
그때 갑작스러운 TF(TaskForce) 파견으로
그렇게는 휴가를 쓸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TF에서 인원을 모집하는 조건은 분명히,
7~8월에 하기휴가를 쓰지 않는 직원이었는데요.
그리고, 저는 많은 직원들이 휴가를 쓰는 7末 8初
그러니까 7월 말에 휴가를 쓰는 것으로
이미 한참 전에 보고를 끝냈었는데...
그건 완전 무시를 당하고, 뭔가 보복성으로?
끝내 TF 파견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파견을 받는 조직에서도
상당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래서 휴가를 붙여 가는 건 상황상 불가했지만
일주일 휴가를 가는 건 그래도 용납이 되어
그냥 반쪽짜리 일반 휴가를 가긴 갔었습니다.
그 이후 올 초에는 설날휴가가 있었습니다.
올해 설날휴가는 월요일만 빼면 화수목금 4일이
붙여졌는데, 마침 정부에서 그 월요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해서 연휴가 일주일간
환상적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때다 싶어, 설날휴가에 근속휴가를
붙이는 것으로 사전 보고를 했었는데요.
그때 저는 위에 언급한 작년 여름의 사례를 들었지만,
조직장은 작년 일은 뭔가 기억이 안 난다는 듯한
예상외의 반응을 보였고,
그러다 어찌어찌 대충 휴가 승인은 받았습니다만,
막상 설날연휴를 2주 정도 앞둔 상황에서는,
“연초에는 할 일이 많지 않냐.”
“나는 괜찮은데, 윗분들이 뭐라 하지 않겠냐.”
“조합원이나 비간부 사원도 아닌,
간부사원(幹部社員)이, 그것도 고참(古參) 직원이
꼭 그래야겠냐.” 등등 뭔가 계속 눈치를 줘서
결국엔 근속휴가를 미룰 수밖에 없었네요.
뭐 사실, 그때 제가 끝까지 우겼으면
환상적인 2주 휴가를 갈 수 있었겠죠.
그때 미리 예약했던 항공권으로,
필리핀 보홀(Bohol)에서 고래상어 투어나
바다거북 투어 등등 동남아의 뜨거운 여름을 즐기며
가족과 같이 리프레시를 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게다가, 저희 가족은 현재 맞벌이 중이고,
첫째가 중2이기 때문에,
방학이 아닌 학기 중에 여행을 가긴 쉽지 않습니다.
특히나, 저희 가족은 해외 주재원 귀임 이후
단 한 번도 해외여행을 간 적이 없었기에
남편의, 그리고 아빠의 휴가가 아이들의 방학 중에
맞춰진다면, 정말 더할 나위가 없었겠죠.
하지만, 매번 그래왔듯
조직에서는 고참 간부사원에게 그런 기회를
잘 제공해 주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상황은 특히나 저에게만
더 빈번하게 발생했던 것 같다고 느꼈는데요.
뭐 어쩌겠습니까.
조직에서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는 건,
어쨌든 제가 넘어야 할 언덕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결국,
저는 휴가의 마감을 앞두고
더 이상 연기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겨우겨우 휴가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휴가기간의 일기예보를 보니
거의 매일 비예보가 있을 정도로 한창 장마철인 데다가
낮최고기온이 33도에 육박하는 때 이른 폭염(暴炎)이
시작되는 시기더라고요.
거기에, 중2 첫째의 기말고사 기간이 휴가 중간에
거짓말처럼 껴 있었네요.
물론, 휴가 때 어디를 가야겠다, 뭐를 해야겠다,
이런 계획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이 휴가를 쓸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했었으니까요.
게다가 이런 식의 마감에 임박해서 겨우겨우 쓴 휴가는
왠지 모르게 좀 씁쓸하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휴가를 쓸 수 있음에 감사해하며,
특별한 계획은 없는, 그런 휴가를 맞았습니다.
그래도 휴가는 휴가니까요.
먼저, 주중에 울리게 한 새벽 알람을 모두 끄고
휴가 중에 읽으려고 한껏 욕심을 부려
회사에서 받은 복지 포인트로 읽고 싶었던 책을
열 권 정도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가지 못했던 서울의 맛집들을
위시 리스트(Wish List)에 넣어뒀고요.
주말에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해서,
차마 가지 못하는 평양냉면집부터 떠올리며,
을밀대, 우래옥, 평양면옥, 을지면옥 중
어디를 선택할까 하는 행복한 고민을 했습니다.
아 맞다! 지지난주 금요일 밤 TV에서 나왔던
서산의 간장게장 식당도 생각이 나서,
서울에서 제일 잘한다는 간장게장집을
맛집 리스트에 빠뜨리지 않고 올려두었네요.
음... 또, 뭐가 있었더라.
아, 광화문의 와플집이 있었군요!
여기도 잊지 않고 저장해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바쁜 일상 탓에 보지 못했던
영화와 넷플릭스 시리즈를 고르고,
집 한편에 쌓아둔, 음악 CD 중
"앗! 이런 게 있었구나!" 하는 것들을
꺼내놓고 하나하나 플레이리스트에 넣었습니다.
그러다 매주 시간 날 때마다 시청하는
토요일의 "영화가 좋다!" 를 틀었는데,
때마침 1990년 국내 개봉작 "시네마 천국" 의 국내
재개봉 소식을 알리면서 영화의 주요 사건과 줄거리를
시청자들에게 가감 없이 보여주더라고요.
아, 그래서 이건 뭐... 제가 갖고 있던 먼지 쌓인
OST를 밖으로 꺼내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음악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가
그의 아들과 같이 작곡했던,
시네마 천국 OST 중, "사랑의 테마" 는
서정적(抒情的)인 멜로디의,
그냥 보는 이와 듣는 이의 눈물을
자아내는 명곡(明曲) 중의 명곡인데,
마침 휴가가 시작된 날,
이 곡이 반복재생 대상곡이 되어
제 마음을 따뜻하게 달래주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영화의 재개봉일에 맞춰
극장 옆 편의점에서 구입한, 아직은 시원했던
맥주 몇 캔을 백팩에 넣어둔 채 (죄송합니다. 쿨럭…)
집 근처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일주일이 쏜살같이 지나갔습니다.
평일의 달콤한 휴가는 끝났지만, 그래도 아직
주말이 있어 휴일을 단 하루 남긴 오늘,
토요일 저녁에 지난 휴가를 돌아보니,
지난주 토요일에 주문했던 열 권의 책 중
단 두권만 완독(完讀)을 했더라고요.
물론 나머지 책들은 대충 페이지를 넘겨보긴 했지만,
그래도 아무 생각 없이 집에 책을 그냥 쌓아놓고
마음대로 읽을 수 있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위시 리스트에 넣어놨던 맛집들은 또
악착같이 갔었네요.
평양냉면과 간장게장, 그리고 와플 등등!
그때가 아니면 그런 음식들을,
그것도 연속해서! 모두 먹어볼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휴가가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에
작년 여름에 뽑은 중대형 SUV, 그것도 4WD 차량의
1년 차 정비를 끝마친 뒤 오랜만에 자차(自車)를
매일 운전해 봤습니다.
덕분에 서울의 맛집과 핫플레이스,
그리고 서울 곳곳에 숨겨둔 보석 같은 저의 장소들을
여유 있게 차례로 방문할 수 있었고요.
게다가 일주일 전에 예보되었던 장마는
2018년 이후 7년 만에 마른장마가 되어
장마전선이 소멸되었다는 뉴스가 주중에 보도되면서,
어쨌든 비는 다행스럽게도 일주일 내내
단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푹푹 찌는 무더위가 시작되었지만
그래도 장마보다는 무더위가 더 나았던 것 같습니다.
#.
흔히들 여행은 떠나서 돌아오는 것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건 여행뿐만 아니라
휴가에도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진정한 휴가는, 돌아갈 곳이 있어야 가능한 거니까요.
만약 돌아갈 곳이 없다면, 그건 휴가가 아니라
갈팡질팡하는 방황(彷徨)에 불과할 것입니다.
사실 휴가 직전에도, 굳이 이 휴가를 써야 할지
계속 고민하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쉼표"가 필요한 순간에 맞춰
제대로 휴식(休息)을 취할 수 있어,
방전(放電)된 몸을 조금이나마 충전(充塡)할 수 있었고
그래서 사무실로 복귀한 이후에도 제 자리에 돌아가서
이전보다 더 성숙된 마음가짐과 더 긍정적인 태도로
일상(日常)을 이어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휴식을 필요로 했던 게 아니라,
휴식이 저에게 자연스럽게 찾아온 것 같은
그런 이상한 착각(錯覺)이 들면서,
단 하루라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던 휴가 이후에도
계속되는, 오랜만에 평안(平安)한 주말의 저녁시간이
이렇게 아쉽게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덧붙임)
그리고 오늘, 7월 5일
이 회사 입사(入社) 21주년(周年)을 맞았습니다
아, 비록 제가 이 회사에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녔고,
또, 해외 주재원(駐在員)도 다녀왔지만, 어찌 됐건!
제가 21년간 한 회사에서 근무했다니!
저조차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사진 1)
도서 "휴가" 이명애 (지은이), 모래알(키다리),
2021년 출간(出刊)
(사진 2)
영화 "시네마 천국" "Nuovo Cinema Paradiso",
1988년 개봉(開封) (※ 이탈리아와 미국 기준)
(국내개봉은 1990년이며, 2025년 7월 국내 재상영)
(사진 3)
서울 평양냉면 맛집 "을밀대"의 평양냉면
(사진 4)
서울 평양냉면 맛집 "을밀대"의 녹두전
(사진 5)
서울 간장게장 맛집 "진미식당"의 게장정식
(사진 6)
서울 간장게장 맛집 "진미식당"의 그림
(사진 7)
서울 와플 맛집
광화문 일민미술관 內 "카페 이마(Café I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