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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나딘 Aug 24. 2020

배어 나오다.

토리의 일상을 보면서 참으로 신기한 경험을 많이 한단다. 눈을 떠서 잠이 드는 순간까지 모든 일이 새롭고 당황의 연속이면서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름 그 안에서 익숙함을 느끼기도 해. 

'엄마'라고 불리는 모든 이들이 이렇게 조금씩 새로움에 적응하고 그 익숙함 안에서 내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강인함을 장착했겠지? 언젠가는 너도 엄마가 될 그 나이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될까? 그러고 보니 이 지구가 아직도 낯설 너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네.


준비라는 것을 전혀 못한 엄마인 내가 토리를 잘 키울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이었어. 그러면서도 절대 하지 말자는 행동에 대한 고집은 강했지. 또 한 가지 간절했던 마음을 덧붙이자면, 내 아이는 스스로를 잘 아는 친구로 키우고 싶었어. 자신을 잘 안다는 것은 아주 쉽다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어려운 일이란다. 또한 자기를 잘 알고 자신만의 삶을 영유하기 위해서는 용기와 자긍심을 필요로 한단다. 


내가 널 낳고 '엄마'로 지내면서 새롭게 깨닫게 된 것 중 하나가 바로 새로운 '나'를 발견했다는 점이야. 나는 너무 강한 성격에 색도 확실하고, 고집도 세고 성격도 급한데 추진력까지 겸비한 대장부 스타일이었지. 그런데 아주 작은 토리가 완전히 나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었어. 난 세상이 너무 무서워졌고, 얼음 같이 냉정하던 내가 늘 '사랑한다'는 말을 달고 살기 시작했어. 그리고 완벽한 정리에 결벽에 가까운 청소쟁이를 벗어나기 시작했단다. 대신 민감했던 감각 중 청력과 냄새를 맡는 능력은 더 예민해졌지만....  나는 원만한 소통을 거부하고 보편적이라는 것들에 대한 이상한 거부감이 있었어. 그래서 난 절대적으로 나와 다른 온전한 '토리' 그 자체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 나를 덧씌우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했던 것 같아. (지금은 이런 생각이 아이를 엄마의 소유라 착각하는 매우 위험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참 DNA는 무섭더라. 언제든 토리는 잠에서 깨어나면 웃는데 항상 긍정적인 아빠를 어쩜 그렇게 닮았니? 그리고 아빠를 닮아 한식을 사랑하는 토리는 어른들의 대단한 사랑을 받는단다. 

그!런!데! 

어쩜 그렇게 안 좋은 것들은 나의 습성들이 배어 나오니? 어느 날 너의 피부에는 갑자기 발진이 돋고 재채기는 알러지가 있는 것 처럼 여러번 하기 시작하더라. 또 어느 날은 발가락을 보는데 기다란 발가락이 모두 둥그렇게 안쪽으로 말려 있더라고. 나중에 오래 걸으면 발가락 마다 물집이 생길텐데....

가끔 웃을 때 너의 눈은 하회탈 마냥 줄무늬만 남기고 눈은 그 자취를 감추는데, 내가 숨기고 싶어하는 점들이 토리를 통해 다시 확인되는 매 순간순간 가슴이 먹먹해지는 그 감정은 어찌 표현할 수 없구나. 

박서보, <묘법>, 1981, 캔버스에 유채와 연필.


이 그림은 박서보라는 작가의 <묘법>이야. 캔버스 위에 색을 칠하고, 그 위를 하얀색으로 덮은 후에 연필로 흰 안료를 긁어내는 작업을 천 번, 만 번 반복하면서 그린 작품이란다. 우리나라의 현대회화를 이끄신 아주 아주 유명한 지금은 할아버지 작가이시란다. 이 작품은 작가 할아버지가 옛날에 그분의 아들이 공책에 연필로 쓰고 지우고.. 하는 행동을 보고는 그것에 어떤 느낌을 받아서 작업하기 시작한 작품이래.

작가는 같은 행동을 수천번 수만 번 그리고 또 그리기를 계속하면서 물체와 자신이 하나가 되고, 또 정신적으로 수련을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이기보다는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아주 높은 정신적 경지에 이르는 수행을 하신다는구나. 


그런데 엄마는 이 작품을 볼 때마다 아래의 색이 위로 배어 나오는 것에 집중하게 되더라. 흰색 위에 연필로 새로 쓰지만 결국은 연필로 긁힌 자욱 아래로 이전의 것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점이 이 작품을 새롭게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어. 그리고 작가의 행위가 무수히 반복된 결과를 보면 조금은 먹먹해지면서 가슴이 아프고, 반성하는 삶을 살게 되더라. 

박서보, <묘법>, 1977, 르몽드 지에 유채와 연필.

내가 아무리 토리를 토리답게, 토리 그 자체의 존재로 자립할 수 있도록 키우려 하지만, 결국은 나의 습성이나 아빠의 모습이 너에게 있다는 점을 통해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구나. 또한 지나온 나의 모습들을 반성하기도 하고. 갑작스러운 너의 발진이 임신 중에 먹었던 라면 때문에 일어났던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것과 같은 작은 반성부터 시작해서 나의 언어 습관이나 행동 모든 것들을 다시 생각한단다.


작품의 바탕이 되는 재료가 각자의 아빠와 엄마의 삶이라면 흰색 물감으로 칠한 것은 엄마 아빠의 결혼 생활인 것 같다. 그리고 연필로 그려진 모든 반복되는 무수한 선은 토리가 그려갈 시간이겠지. 우리의 관계가 작가 따로 존재할 수 없지만 스스로를 스며들게 하고 또 배어 나오게 하는 만큼 앞으로는 조금 더 바른 생각으로 살아야겠구나.  


한국 현대회화의 시작인 단색화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이 지난 몇 년 동안 엄마를 잠식했었는데, 토리를 낳고 나서부터는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는구나. 이 또한 너에게 감사할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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