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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나딘 Sep 18. 2020

퍼포먼서

오감을 키우는 것이 그리도 중요할까? 그거야 커봐야 아는 것이겠지만...

그리 중요하다고 곳곳에서 떠들고 있으니 나도 한번 해보리라!

육아를 책으로 하려 덤볐던 나 자신이 엄청 싫어지던 순간에도 몰입하는 토리를 보면 스스로 칭찬하는 과정을 무한 반복하던 시절이었단다. 세상에 모든 일이 그리도 신기할까? 가장 좋아했던 놀이는 물감 놀이였지.

과감하게 거의 매일 화장실 청소... 아니 화장실 설거지를 한다는 마음으로 이 놀이를 해줬단다.

엄마 친구도 미술사를 공부했기에 토리가 만들어 놓은 결과를 보고 표현주의, 액션 페인팅, 퍼포먼스 등등으로 규정하곤 했단다. 하긴 우리 끼리는 "안녕하세요? 아무개 씨~"하면서 귀스타브 쿠르베를 떠올리고 깔깔거렸었으니, 귀여운 토리의 결과물을 보고는 당연히 그런 농담을 하며 웃었지.

토리에게 내가 건네준 물감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였어. 검은색이나 보라색은 너무 짙고 어두워서 배제했고, 녹색과 노란색, 흰색 그리고 붉은색을 돌아가면서 줬단다. 결국은 다 섞여서 알아볼 수 없었지만 말이야.

스스로 서있기도 힘들었던 1살 아이가 거친 숨을 뱉어내면서 열심히 벽에 물감을 바르는 모습은 아마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최선'이었던 것 같아. 그 순간순간 우연히 섞이고 흔적인 남았다가 지워지며 새로운 흔적을 남기는 그 과정이 내 눈엔 플럭서스나 해프닝과 같은 모습으로 보였단다.

아주아주 유명한 백남준이라는 아저씨와 견준다면 너무 과하겠지? 그런데 물성과 행위자의 과정에 방점을 찍는다는 점에서 넌 나만의 백남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림에 보이는 작가가 백남준이야. 머리카락에 먹물을 묻혀 종이에 선을 긋는 모습을 찍은 거란다. <머리를 위한 선>이라는 작품이야. 이 작품은 신기하게도 종이 위의 그려진 선 보다는 머리를 먹물에 찍고 그것을 그려나가는 과정이 매우 중요한 것이란다. 플럭서스 작가들은 작품이란 말 그대로 만들어진 사물이나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흐름'으로 있는 것이라고 말해. 내 눈에도 네가 오감을 느끼고 끈적임과 차가운 벽, 그리고 너의 손에 느껴지는 그 감각을 지속하려고 마구 마구 물감을 문지르는 그 과정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여서 아마도 이 장면이 떠올랐던 것 같아. 물론 너의 행위를 예술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지. 엄마의 눈에만 그렇단다.

‘TACET’는 '침묵'이라는 의미입니다.

백남준은 존 케이지라는 작가를 아버지라고 불렀어. 그분 역시 대단한 연주를 했던 사람으로 유명하지. 피아노 연주를 하는데 4분 33초 동안 아~~~ 무런 건반도 누르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단다. 그렇지만 피아노 연주는 악장을 구분해야 하기에 33초, 2분 40초, 1분 20초마다 피아노 뚜껑을 열고 닿았어. 물론 그 역시 악보에 쓰여 있던 거야.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하지 않으니 청중들의 숨소리, 기침소리 등 자연스럽게 소음으로 불리는 사운드가 공연장을 가득 메웠단다. 모든 것이 다 연주가 되도록 만든 샘이지. 


당시의 작가들이 보였던 행위는 예술사에 오래도록 남을 대담함을 보였단다. 다소 과격하기도 했고, 정신병자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들은 지속해서 자신의 예술 활동을 이어 나갔단다. 쉽지 않았을 것이고, 정신적으로도 고된 나날들이었을 거야. 


토리는 쉽고 재미를 위해, 소근육이나 감각의 발달을 위해 엄마가 준비한 놀이들을 이어갔단다. 그러나 이러한 놀이가 훗날 너에게 섬세함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조금은 이상하게 보여도 소신껏 너의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기대를 하면 안 된다는 점을 알면서도 난 또 이런 말을 늘어놓는구나. 미안!

그렇지만 이거 하나만 알아주라. 진짜 오감놀이는 죽~!!!도록 힘들다는 거. 두부를 으깨서 온 거실에 다 던지고, 비벼놓고, 화장실 벽과 너의 온몸에 묻은 물감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우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는 거 말이야. 조금은 너에게 긍정적인 영향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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