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아이가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3개월 정도 지났을 즈음 그녀는 마음을 굳혔다. 아이가 남달리 총명하였다. (그녀는 그렇게 느꼈다). 글자 한 자 익히지 않은 채 시작한 학교생활에서 아이는 도드라졌다. 그녀의 마음에 조바심이 났다.
아이가 국민학교 시작을 앞둔 겨울. 10년 남짓 공들인 계가 망가진 후, 심지가 약했던 남편은 그녀보다 더 깊은 상실감을 느꼈고, 그의 성격대로 많이 방황하였다. 출입하지 않았던 겨울날 주막 노름방에도 기웃거리는 듯했다. 한번 안된 것일 뿐 지금부터 다시 하면 되지 않느냐는 그녀의 말은 그에게 닿지 않았다. 그녀와 그녀 쪽 사람들로 인한 실패라고 여긴 터라 그녀의 말은 더욱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남편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은, 어린 시절 습성이 찾아들어 그대로 돌아간 듯했다. 나서진 않았지만 친구들이 있는 곳이면 마다하지 않았다. 마지막 목적지는 겨울밤 노름방이었고, 도박에 소질 없는 남편은 쉽게 털리고, 옆방에 마련된 술자리를 즐겼다.
그녀의 가슴은 타들어 갔다. 새벽까지 들어오지 않는 남편들을 포기하고 사는 게 예사였으나, 그녀는 악착같이 남편이 있는 곳을 찾아내고 때를 구분하지 않고 찾아 들어가 남편을 데리고 나왔다. 남자가 여름내 고생했으니 겨우내 좀 편하게 노는 건 어느 정도 괜찮다고들 인정해주는 시골 마을에서는 의외의 일이자 괴이한 일이기조차 했다. 사람들은 여자가 남자를 질투하고 시기하고 못살게 군다고 오히려 그녀를 나무랐다. 남편이 여기서 주저앉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드는 순간, 그녀는 저녁상 차리는 것을 포기하고 나서서 남편이 있는 곳을 수소문했고, 그의 손은 놓지 않고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돌아오는 길 위에서 몇 차례 부부간에 언성이 높았고, 티격태격 거림이 있으면서 한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 어느 2월 마지막 즈음, 남편의 인내심도 그녀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랐던 한 때, 엉망으로 취한 남편을 그녀는 거의 막무가내로 끌고 집에 들어왔고, 이걸 수모라고 생각한 남편은 그녀에게 손찌검을 하고 말았다. 아이는 아침에 그녀의 얼굴에서 약간 푸른빛을 볼 수 있었다. (엄마는 묵묵했고, 그만큼 슬퍼 보인 적은 없었고, 하루 종일 한 곳만 바라보았다.)
그녀가 서울행을 결심하지 못한 마지막 끈이 끊어졌다. 이 끈이 떨어지는 순간은 참담했지만, 곧바로 모든 게 명확해졌다.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차곡차곡 모아둔 모시판 돈을 고모에게 부쳤다. 고모는 그 돈을 합쳐서 조금 널찍한 방을 구할 것이다. 그리고 1학기가 끝나가는 7월 초, 아이 전학 절차를 시작했다.
여름 무더위가 막 시작되던 날
어망과 대낚시를 들고 앞 동네 저수지로 몰려나갈 준비를 마친 아이들은 더 이상 아이가 마을에 없는 걸 발견하고 한동안 멍하니 두리번거렸다. 그 전날 아침 일찍 엄마 손을 잡고 어디론가 가더라는 말만 떠돌아 전해졌다.
-그럼 더 이상 인철이는 우리 동네에 없는 거야?
-응, 응, 응..
-어제 엄마 따라서 서울로 갔대
-진짜? 서울은 사람도 많고 겁나게 크다던데.
그녀는 서울로 떠나기 전 날까지 할 수 있는 모든 노동을 쏟아부었다. 마지막 남은 논 피질(풀매기)까지 마쳤을 때, 그녀는 가벼운 어지러움증을 느꼈다. 한 여름 햇빛 아래서 쉬지 않고 일하다 보면 여느 장정이라도 못 버틸 것을, 그녀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며칠째 논바닥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그 의미를 알고 있었고 말리지 못했다. 자기가 잘못한 게 결정적이었다는 것도 깨닫고 있었다. 언젠간 벌어질 일이었고, 더 젊었던 시절 부부가 암묵적으로 강고하게 결의한 공동의 목표점이었으므로 사력을 다하는 아내의 이번 행동을 사실상 막을 수 없었다. 더 보태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서운하고, 객지로 보내서 고생할 생각에 마음이 가볍지 않았을 뿐이다.
부모님들에겐 아이 전학절차를 진행할 때 넌지시 말씀드렸다. 올 방학 시작하면 아이 데리고 서울로 가겠다고...
성심껏 마지막 저녁밥상을 차렸다
부모가 자기 새끼를 데리고 가겠다는 데에 한 두 마디 언짢은 핀잔을 얻는 것도 마땅치 않아, 시아버지는 시종 침묵으로 일관했다. 아이는 여느 때처럼 할아버지 오른쪽 곁에 바짝 붙어 앉아있었다. 평소보다 말이 없는 긴 저녁식사가 끝나고 숭늉을 내올 즈음, 시아버지는 간신히 신음하듯 말문을 여셨다.
‘니들이야 젊으니 고생해도 고생이 아니겠지만, 애는 어쩔 것이냐. 변변히 먹고 잘 수 있겠느냐’ 시아버지의 염려는 한 군데에 닿아 있었다.
‘서울서는 다들 그렇게 지내고는 한답니다. 서울 애들하고 살다 보면 배우는 게 많을 겁니다.’ 그녀는 더 물러서지 않겠다는 답변을 하였다.
‘어린애가 많이 배운다고 능사는 아니다. 팔 팔거리고 뛰놀던 애가 기죽지 않기 쉽지 않을게다.’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일이 실제 어떻게 벌어질지 그녀로서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도시 사람들이라고 마냥 냉정하고 박하기만 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그곳도 사람들이 사는 곳 아니던가? 내심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시집올 때 갖고 온 옷가방을 꼭 필요한 것들로 빼곡히 채웠다. 짐보따리는 모두 세 개였다. 옷가방, 마늘/시래기 등 챙겨갈 수 있는 음식들 한 따리, 혹시나 하는 생각에 쌀 한말, 콩, 들깨 같은 곡식류 한 보따리. 세 보따리를 구석에 챙겨 넣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새벽이 밝아 왔다. 고향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엄마한테 얘기해야 하는데… 둘째 언니한테 얘기했으니 엄마도 아시게 되겠지. 엄마 얼굴을 한번 보고 올라갈까 망설였으나 이내 다음 날 올라갈 결심을 다시 굳혔다. 엄마 얼굴을 보면 왠지 마음이 약해질 것 같고, 시간만 지체될 것 같았다.
사실 지난 두세 달 동안 그녀는 시댁 식구 전부와 알게 모르게 온몸을 다해 싸워왔다. 그녀가 비운 공간을 물리적으로 메워야 하는 사람들 모두 그녀의 결심이 마뜩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그중에서 가장 세게, 자주 반대의사를 표현하였다. 그녀가 싸우는 방법은 일언반구 댓구하지 않는 것이었다. 밤이 되면 아이 손을 부여잡고 간신히 잠이 들었고, 새벽이면 어느 때보다 일찍 일어나 아침 준비 아침 일거리를 마쳐 놓았다. 어떤 작은 것도 책잡힐 일은 하지 않겠다는 게 뚜렷했다. 남편은 처음엔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고, 이렇게 서둘러서 어떻게 할 거냐고 반대했으나, 그녀의 의지가 워낙 강한 것을 확인하고 더 이상 반대도 찬성도 하지 않는 묵인하고 침묵하는 태도를 취했다.
상경하는 날.
그녀는 새벽에 일어나 평소처럼 아침밥상을 차렸다. 시간이 좀 일렀으므로 밥 보자기로 잘 덮어 놓고 남편이 들고 들어가도록 해 놓았다. 먼동이 터 올 즈음, 무거운 음식 보따리는 머리에 이고 왼손으로는 옷 보따리를, 오른손으로는 옷가방을 밀며 시댁 대문을 나섰다. 시아버지는 앞마당 텃밭까지 따라 나오시며 떠나는 사람들 뒷모습을 말없이 배웅했다. 시어머니는 그 전날까지 한 번도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이 모든 게 당신이 싫어서 저 아이가 저러는 것이라는 말씀으로 숨 넘어갈 듯 그녀를 몰아붙이다가 지치다가를 근 며칠째 반복하고 있었다.
홍산으로 가는 첫 시내버스가 정류소에 도착하자, 아이를 먼저 버스에 태우고 자리를 잡도록 했다. 그리고 천천히 옷 보따리와 가방을 들어 차에 실었다. 7시에 도착한 버스는 7시 10분에 시골마을을 출발하였다.
9시 30분경에 홍산을 떠난 직행버스는 오후 늦게 되어서야 용산에 도착했다. 이름은 직행버스였으나 부여, 공주, 천안에서 오랫동안 머물렀고 그 외 필요한 곳에서 더 정차하여 손님을 싣고 내렸다.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아이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특히 버스가 고속도로에 접어들어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기 시작했을 때, 창 밖으로 시시각각 다른 사물과 풍경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보며 작게 탄성을 질렀다.
'와, 엄마. 여기는 빨리 지나가고 저 멀리는 멈춰있는 것 같아요'
아이의 낮은 탄성 소리를 듣고 그녀는 아이 쪽으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버스는 이제 천안을 지나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고 있었다. 아직 감당해야 할 차량이 많지 않아서인지 고속도로는 검은 빛깔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검은 고속도로, 그 위로 선명하게 찍혀있는 차선을 따라 버스는 굉음을 내며 내달렸다. 여기를 달리기 위해 구불구불한 국도를 서너 시간 헤쳐온 것처럼, 버스는 원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서울에 다와 갈수록, 그녀의 마음은 마치 난파당한 배처럼 맥없이 출렁였다. 한없이 밀려 오르다가 갑자기 푹 고꾸라지기를 반복했다. 버스는 그날따라 더 많이 흔들렸다.
버스가 터미널에 멈춰 서자, 같이 타고 왔던 몇십 명은 어마어마한 인파 속으로 보잘것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버스가 멈추기 직전까지, 버스 안은 같은 고향사람들이 숨을 섞고 말을 섞던 공간이었으나, 버스가 멈추고 사람들이 밀물처럼 사라져 버린 터미널은 마시는 공기에서 매캐한 냄새가 나는, 그야말로 낯선 서울이었다. 그녀는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버스 안에서 차창밖을 신기하게 쳐다보던 아이는 약간 주눅이 든 듯,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으려 했다.
고모가 알려준 대로 76번 버스를 타고, 금호동 고개를 넘은 후 두 번째 정거장인 금남시장 앞에서 내렸다. 많은 짐을 싣고 내리는 것은 버스 안내양의 손을 빌었다. 금남시장 앞에 도착하자 고모가 기다리고 있었다. 고모를 따라 길을 건너 상가 건물 옆으로 난 작은 골목길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골목길을 만들어 낸 집들이 놀라울 만치 낮고 작았다. 어느 집은 집의 바닥이 길보다 낮게 위치해서 아이의 눈높이로 창이 보이고 창 너머 사람들이 보였다. 저 안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밝은 형광등 아래에서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어느 집을 지날 때 철창 너머 유리창 안에서 억센 남자의 욕지거리가 들렸다. 유리창은 터무니없이 낮아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들리듯 했다. 긴 경사면 골목길을 오르다 왼쪽으로 꺾어 들어서자 약간 널따란 골목이 나타났다. 엄마와 아이는 서로 손을 꽉 쥐고 묵묵히 고모를 따라 걸었다. 골목길은 시멘트 블록으로 덮여 있었는데, 평평한 구석은 없고 대부분 꺼지거나 솟아올라 흡사 파도를 치는 듯했다. 백열등으로 만들어진 가로등은 전봇대에 낮게 걸려있었지만 좁은 골목을 비추는 것도 힘겨워 보여, 그저 제 위치만을 알리는 정도였다. 골목길 밑에서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하수구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서울이... 그렇지.. 언니?' 그녀의 심정을 안다는 듯 고모는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나이에 비해 사람을 배려하는 깊이가 남달랐다. '어이, 내 조카.. 오느라 고생 많았네' 아이를 쳐다보며 살짝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녀는 별 말없이 가볍게 웃으면서 길목길을 걸어 올라갔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최고조에 달했던 그녀의 심정은 어느 새 안정되어 있었다. 어차피 새로운 곳에서 살기로 한 이상 이 정도 낯선 것은 별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고모, 아직 저녁 안 먹었지? 우리 기다린다고.. 미안하게..' 그녀는 고모에게 첫인사를 건넸다. 남에게 일절 도움받거나, 불편을 끼치는 일을 끔찍이 싫어하는 그녀로 돌아와 있었다.
'응, 밥은 해놨어요' 고모는 부엌일을 싫어하였고, 싫어하는 것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천상 막내였달까.
'우리 엄마가 많이 화나셨지?' 고모의 질문이 이어졌다.
'응, 내가 죄송하지.. 몇십 년 부엌살이에서 겨우 물러나셨는데, 며느리 잘못 두셔서 다시 부엌일을 하시게 되었어. 고우신 분인데..' 그녀는 진심으로 그 점을 죄송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상경을 며칠 앞두고는 둘째 며느리에게 자주 큰 집에 들러서 시어머니를 도와드릴 것을 신신당부를 해 두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고모가 안내한 집은 도로에서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세 개 계단을 내려서야 비로소 마당에 닿았다. 대문 바로 오른쪽에 수도시설과 바깥 화장실이 있었고, 안쪽으로 항아리들이 옹기종기 모인 장독대가 자리했다. 수도시설과 화장실은 세를 들어 살아갈 사람들의 것이고 장독대는 주인집 것이었다. 주인아줌마는 태생이 서울 사람이라고 했다. 주인아저씨는 사우디로 일을 나갔고, 홀로 집을 지키고 있었다.
수돗가 맞은편에, 누가 봐도 간이식으로 쌓아 올린 벽과 키가 크지 않은 고모도 허리를 숙여야 들어갈 높이의 문이 빼꼼하게 나 있었는데, 설마했지만 역시 그 문 안으로 들어서야 했다. 조그만 찬장, 토방 위 놓인 밥상, 구석에 가지런히 놓인 양파를 비롯한 부식물들이 이곳이 부엌임을 알려주었다. 연탄집 두 개를 넣을 수 있는 토방 우측으로 난 문을 열자 침침한 형광등이 어둡게 밝히고 있는 세 평정도 되는 크기의 방이 나타났다. 공부하는 대학생의 책상 하나 여유 있게 담고 있기 불편한 규모였다. 고모는 우선 여기서 시작하자고 했다. 자신은 주중이면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주말이면 교회에서 대부분 생활하니 언니와 아이가 온전히 사용하면 된다고 했다. 방값은 고모가 반, 그녀가 반 부담하기로 했다.
가져온 짐이 많지 않았으므로 작은 공간에 가져온 것을 섞어 정리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옷가지를 넣을 비키니 옷장에는 약간 여유가 있었다. 아이 옷은 옷장 맨 밑에 따로 접어 두었다. 아이는 고모가 사뒀다는 앉은뱅이책상 위에 가져온 가방과 책들을 정리했다. 마치 자신은 이 일을 하기 위해 이 곳에 왔다는 듯이, 그 정리하는 순간만큼은 자신이 어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누군가가 된 느낌이었다. 그런 아이를 그녀는 잠시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 시어머니는 딸에게 전해 줄 것들을 챙겨그녀의 짐 안에 넣어두어서, 정리하고 챙겨야 할 것들은 부엌쪽에 더 많았다. 마른 박대, 멸치, 서천산 김, 미역 등이 그것들이다. 학생 혼자 사는 공간이라 이런 것들을 수납해둘 찬장 같은 게 마땅치 않았다. 그녀는 아까 올라오면서 본 시장통으로 나가 크지 않은 찬장, 도마 외에 식기와 세제, 간단한 양념거리들과 반찬거리들을 사 왔다. 부엌 한편에 찬장이 놓이고 찬장 안은 그녀가 시골에서 가져온 것과 장 봐온 것으로 순식간에 빼곡해졌다. 찬장이 들어서고, 도마와 칼이 자리를 잡자 부엌은 어느덧 부엌다워졌다. 곤로에는 석유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다시 석유를 사러 나가야 했다. 석유를 채우고 화력을 확인하고 시골에서 가져온 된장으로 찌개를 끓였다.
세 사람은 이렇게 간단히 저녁을 들었다. 급하게 차리긴 했지만, 아이의 고모에겐 따듯하고 정감 있는 밥상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집에서 따듯한 밥을 먹어보는 것이다. 그녀는 주인아주머니가 잘 구워진 김을 건네어 주었을 때,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고맙게 받았다. 주인아주머니의 마음 씀씀이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녁 밥상을 차려내면서, 그녀는 마음속에 아직 조그맣게 남아있던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의구심을 깨끗이 벗어 버릴 수 있었다. ‘그래 어디서든 따듯한 밥 한상 못 차려낼까?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이지….’ 어떤 면에서는 이 밥상 차려내는 것으로 그녀는 그녀가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온 목적 하나를 달성한 셈이 되었다. 이 곳에서는 자신과 아이를 위해서만 밥상을 차려도 되는 것이다. 밥상 차리는 것이 더 이상 시집살이를 대표하는 엄청난 노동이 될 필요는 없었다. 시골에서는 모든 사람의 밥상을 그녀가 차렸다. 시부모, 남편, 아이들, 일꾼들, 손님들, 제사상, 잔칫상, 품앗이상 그 모든 사람들이 이제 스물 갓 지난 그녀에게 시시때때로 밥상을 차려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이제 그녀는 자신과 아이만의 밥상을 간단하게 차릴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시간을 서울에서 자리를 잡기 위한 일에 쓸 생각이었다.
아침 일찍 시골을 나선 후 늦은 저녁이 되어서, 완전히 타지인 이곳에서 따듯한 밥을 먹는다. 시집 온 이후 가장 한 것 지고, 속 편한 저녁식사였다. 그녀는 이제야 한 밥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식사하고,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었고, 같이 식사를 마쳤다. 배가 고팠는지 아이도 다른 생각할 겨를 없이 밥 먹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첫날밤, 가슴속에는 설렘과 기대감이 컸고, 두려움은 작았다. 틈틈이 모아둔 돈이 조금 있어서 당장 생활고가 목에 차지 않았다. 내일부터 천천히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볼 것이다. 아이의 고모는, 학생인지라 크게 현실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간단히 알아본 바로는,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거리는 식당일, 가정주부(식모일), 방직공장 일 등이 있었다. 조금 비용을 투자하면 작은 채소가게나 쌀가게 같은 것을 해볼 수 있었지만 이런 것은 꽤 많은 비용이 드는 것이어서 좀 시간을 두고 알아보기로 했다. 어떤 것인들 시골의 농사일보다 어렵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