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드라마 캐릭터에 가장 감명을 받았으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절대 다수의 드라마작가들이 거쳐온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 방작원의 교육과정은 습작 제출과 합평 외에는 사실 정해진 의무 커리큘럼이 없기 때문에 선생님(작가 혹은 연출PD / 정보 비공개, 오직 합격 후에만 배정된 선생님을 알 수 있습니다.)에 따라 강의내용과 방식에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때문에 수강 후기조차 천차만별이고요.
저는 전문반까지 수료하며 두 분의 작가님과 한 분의 감독님 수업을 거쳤는데, 교과서적인 정돈된 이론을 배우기 보다는 기제작 단막극 분석과 습작 대본 합평을 위주로 하는 수업이었습니다. 교육원에서 얻은 가장 큰 배움은 지치지 않는 드라마에 대한 사랑이었어요. 이미 십수 년의 경력이 있으신 선생님들이시지만, 여전히 더 좋은 드라마를 만들고 싶어하시고, 보고 싶어하세요. 물론 표현방식도 선생님들마다 매우 다릅니다. 더 좋은 대본을 쓰길 바라는 마음에 합평으로 사정없이 두드려 패시기도...
여튼 드라마작가과정 기초반에 지원하려면 한 페이지 분량의 짧은 에세이를 제출해야 합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면접으로 원생을 선발했었던 까닭에 제가 지원했던 2021년 초엔 관련 후기나 예시를 찾을 수 없어 막막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참 많이 부족한 글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한 가닥 실마리 정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올립니다.
당시 에세이 주제는 '어떤 드라마 캐릭터에 가장 감명을 받았으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였고,
저는 드라마 <괴물>의 이동식을 선택했습니다.
살인을 매개로 한 이야기를 즐겨 읽고, 본다. 살인이란 한 번 벌어지면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밟고 디딘다 해도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든 깊은 구렁이다. 그것을 경험한 사람과 경험하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선명한 간극이 있다. 그래서 살인은 심연과 같다. 나는 아마도, 그리고 부디 바라건대, 내 평생 가까이 가지 못할 심연을 이야기를 통해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럴 때면 심연은 종종 내게 물음을 던진다. 아무도 쉽게 건네지 않을 물음을.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그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볼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146절.
JTBC 드라마 <괴물>(극본 김수진)의 주인공 이동식에게는 광기가 서려 있다. 동식의 또라이 같은 말과 행동은 때론 섬뜩하기까지 하지만, 절대 법과 원칙을 벗어나는 법은 없다. 그는 누구보다 법을 잘 알고, 법을 도구로 사람들을 지킨다. 점 당 오십 원 화투판을 벌인 동네 아줌마들을 모조리 도박죄로 잡아들이며 난장을 피워대도, 알고 보면 더 큰 사달을 막기 위한 배려였을 뿐이다.
그런 동식은 사실 가족을 잃고는 살인자로 몰렸었고, 동료를 잃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처절한 서사가 드러날수록 나는 동식의 편으로 기울었다. 그래, 그에게 비치는 광기에는 응당한 이유가 있다. 나였어도 맨정신이긴 힘들겠지. 동식이 여태 간직한 나름의 따스함이, 그가 사수해온 법과 원칙이, 오히려 기적처럼 느껴졌다.
시신을 수습하고자 하는 피해자 가족의 간절함을 어떻게 괴물 같다 할 수 있을까. 내 가족을 죽인 살인자를 잡고 싶고, 죽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세상 어디 있을까. 이 불쌍한 남자를 범인으로 몰아가려는 한주원이야말로 진짜 괴물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동식이 물었다. “어디까지 갈 수 있습니까, 법과 원칙 그딴 거 다 던져버릴 수 있어요?” 동식은 선택했던 것이다. 당장 범인을 신고하는 대신, 빠져나갈 수 없는 덫을 놓아 잡기로. 증거를 만들어서라도 그 살인자를 반드시 처벌하기로. 그는 자신이 친딸처럼 사랑했던 강민정의 절단된 손가락 마디마디를 직접 진열하고서는 무대의 막을 올렸다. 그리고 그의 선택에 민정은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법을 어겼고, 원칙이 꺾였으며, 살 수 있었던 사람이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동식에게 등을 돌릴 수 없었다. 그의 의도는 선했다. 그는 괴물이 아니다.
그러자 심연이 나에게 물었다. 괴물은 누구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