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얼마 만이야. 막 지하철 개찰구를 나서는 나에게 말을 건 사람은 Y였다.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꼭 대학 신입 때처럼 운동화에 보세 청바지, 싸구려 면 티셔츠를 걸치고, 천으로 된 큼지막한 가방을 멘 채였다. 설마 동창회 가는 길? Y는 가방끈을 말아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출구를 나서자 상가 너머로 학군지로 유명한 빽빽한 아파트 단지가 펼쳐졌다. 유독 이 근방에 사는 동창이 많았다. Y는 문득 무슨 생각이라도 떠오른 듯 양손 엄지와 검지로 네모 프레임을 만들어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 안에 과연 몇 세대가 들어있을까? 못해도 수백 세대는 되겠지? 이렇게 집이 많은데... Y는 말을 잇는 대신 괜스레 제 손바닥을 옷에 부비며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어쩐지 사뭇 달라진 모습이었다.
원래 취향이 확고한 Y는 고가의 물건에 꽤 무심한 편이었다. 대학 때 한번은 어느 컬렉션에서 본 듯한 가방을 들고 나타났길래 어디 거냐고 물으니 대뜸 인터넷 쇼핑몰을 추천해 줬다. 자기가 짝퉁을 산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마흔이 넘은 너는, 오늘 내가 이 자리를 위해 얼마나 투자했는지 알까? 나 잠깐 가방 좀 들어줄래? Y의 손에 가방을 떠넘기고 스카프를 고쳐 맸다. Y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넌 여전히 예쁘다. 패셔너블하고. 피식 웃음이 났다. 속으로 너도 여전하구나 생각했다. 지금 제 손에 얼마짜리가 들려있는 줄도 모르고.
내가 알기로 Y의 가장 큰 지출은 바로 집이다. 지독한 집순이인 Y는 자신의 안녕이 곧 집으로부터 온다고 믿었다. 한 푼 없이 독립하느라 빚을 내면서도 어찌나 까다롭던지. 강남 빌라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부동산을 소개해 줬더니 반지하도 아니고 그저 창문이 앞집 벽으로 막혀있을 뿐인 방을 계약하지 않겠다고 고집부렸던 것이 벌써 십수 년 전 일이다.
고르고 고른 Y의 작은방은 언제나 잡다한 물건으로 가득했다. 프레임 없는 매트리스, 조립식 행거, 상자를 쌓아 만든 서랍장 따위에 다 읽지도 못한 책들이 한가득. 고작 한 뼘 남은 바닥에 우리가 무릎을 모으고 둘러앉아 술을 마시다 잠이 든 다음 날이면 초라한 살림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싱글벙글 웃으며 냉장고를 털어 아침상을 차려주곤 했다.
동기들은 하나둘 결혼하며 집을 샀다. 다들 사는 게 바쁘니 Y의 방에 가는 일은 점차 줄어들었다. Y가 매년 월세방을 옮긴 탓에 언제부턴가 어디에 사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요즘은 어디 사냐고 묻자 Y는 서울 외곽에 산다고 했다. 하긴, 넌 애가 없으니까. 월세? 아니, 전세! 대답하는 Y의 얼굴이 익숙했다. 좁아터진 방구석에서 아침상을 내어주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얘가 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대출 얼마나 받았어? 이자는? 너 진짜 언제 철드냐. 번호 그대로지? 냉큼 가방을 다시 빼앗아 핸드폰을 꺼내고 대출상담사 명함 2개를 전송했다. 카톡을 확인한 Y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몇 번이고 고맙다고 인사했다. 고맙긴. 우리 신랑이 임대업 하잖아.
야, 뭐하냐? 이번엔 또 누구야, 돌아보니 C였다. C는 막 주차한 듯 운전석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몸매가 드러나는 동탄 미시룩에 일명 양카로 유명한 B사의 차다. 동창회가 클럽인가. 차는 또 왜 끌고 왔대. 얘도 여전하구만. 잠깐 얘기하고 있었지, 하고 다시 앞을 보니 Y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 가 버린 거야?
동창회가 벌어지고 있는 지하의 호프집은 입구에서부터 지린내가 났다. 도대체 누가 이런 데를 잡은 거야? 이 동네는 학원 말곤 다 지하에 짜부라져 있다더니 진짜네. 진기한 구경이라도 하듯 잠시 두리번거리던 C는 슈트를 입은 남자 동기 무리가 차지한 가운데 테이블로 향했다. 가슴을 퉁기며 걸어가자 빈틈이라곤 없던 테이블에 모세의 기적처럼 그녀의 자리가 마련됐다. 사회에 찌든 녀석들의 얼굴이 헤벌쭉 벌어졌다. 짐승들.
그중 한 마리의 눈길이 나에게 향했다. 은행원 A다. 분명 카드나 예적금 팔려고 먹잇감을 찾는 거지. 못 본 척 빠른 걸음으로 다른 테이블로 향하는 나를 낯선 손이 덥석 붙잡았다. 얼마 전 우리 옆 동네에 개업한 치과의사 H다. 꼴에 무리해서 강남에 차리느라 빚만 수백억이라던데... 그때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Y가 보였다.
벌써 몇 잔 마셨는지 하얀 얼굴이었다. 술을 마실수록 창백해지는 Y는 아무도 취했다는 걸 믿어주지 않아 회식 때마다 힘들다고 토로하곤 했었다. 물을 한 잔 따라 앞에 놓아주자, Y는 갑자기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1년 반 전 첫 전세를 계약하고, 처음으로 이사 없는 한 해를 보내서 좋았지만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아직 6개월이나 남았는데, 집주인이 빨리 재계약할지 말지 알려달래. 2개월 전까지만 말하면 되는 거 아닌가? 자꾸 전화 와서 재촉해. 그때 이사 가능한 다른 매물들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혹시 이 집에 뭐 다른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
야! 문제는 무슨, 너 나간다고 하면 돌려줄 돈 마련하려고 그러는 거잖아! 하도 기가 막힌 소리를 하길래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순간 동창들의 시선이 나에게 쏟아졌지만, Y의 무식함 때문에 내가 창피를 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니가 2개월 전에 나간다고 말하면, 세입자가 바로 구해지겠니? 그럼 돈 못 돌려줄 수도 있잖아. 다 너 생각해서..
혹시 해서 보증보험도 가입했는데... 그래서 뭐! 집주인 임차권 등기 당해서 엿 먹어보라는 거야 뭐야? 정말이지 이런 개념 없는 임차인들 때문에 임대인들이 참 고생이야. 6개월 전, 못해도 네다섯 달 전 엔 알려줘야지! 일찍 나가려면 니가 복비도 내고, 다음 세입자도 구해놓고!
그러고 보니 다음주에 재계약하기로 한 세입자가 떠올랐다. 특약을 넣으라고 해야겠다. 아예 못을 박아 버려야지. Y는 이제야 자신의 한심함을 깨달았는지 멍하니 물잔만 내려다보았다. 나는 생각난 김에 바로 세입자에게 전화하러 화장실로 향했다.
이미 기존 조건 그대로 하기로 합의하셨잖아요. 전세금은 저희가 양보해서 법정 한도 다 올려드린다고 했고... 이 사람, 주제도 모르고 개념도 없다. 합의라니요? 아직 계약서에 도장 안 찍었잖아요? 그리고 양보는 제가 해드린 거죠. 지금 시가가 얼만 줄 아세요?! 임대차 3법인가 하는, 그 그지 같은 법 때문이다. 그지들이 급도 모르고 지들이 갑인 줄 나댄다. 도대체 나라 꼴이 어떻게 되려고.
한참을 통화하다 자리로 돌아갔다. Y 대신 C가 자리에 앉아 내 가방을 요리조리 살펴보고 있었다. 기지배,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그런데 C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찐이네. 니가 이걸 어떻게 샀어? ...뭐?
A가 그러던데, 니 남편 전세 사기로 감옥 갔다고. 재산 숨기려고 위장 이혼이라도 했어?
사기라니! 쟤는 은행원이라는 애가 유동성 위기라는 말도 모른대?! Y 같이 무식한 세입자들 차별 안 하고 받아줬더니, 그지들이 아무 때나 나가겠다고 떼쓴 거야. 덤탱이 쓴 우리가 피해자야!
설마 했는데 진짜구나...? 근데.. 어떻게 Y를 입에 올리냐... 전세 사기당해서 죽은 애를...
...??? 무슨 소리야 방금 전까지 나랑 얘기... C의 말에 황당해하는 순간, H가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너넨 참 여전하다. 애 엄마 맞아? 얼굴이며, 몸매며. 관리 열심히 하나 봐? C는 웩, 구역질하는 시늉을 하며 벌떡 일어나더니 다시 가운데 테이블로 가버렸다.
H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옆에 나란히 앉았다. 나 너 걱정했다. 이번에 고생하고 좀 아프다길래. 근데 괜한 걱정이었네. H는 빠르게 내 목덜미에 붙은 라벨을 훑어보더니 제 엉덩이를 나에게 바짝 붙였다. 치과 냄새가 훅 풍겨오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나는 Y에게 보냈던 카톡을 열었다. 숫자 1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지하라서 그런가?
H가 속삭였다. 우리, 먼저 나갈래? 오래전, C와 클럽을 들락거리던 때 자주 들었던 말이다. C 저년은 남자 무는 데 실패한 날엔 툭하면 Y네 집에서 잤다. 근데 지는 Y한테 월세라도 줬나? 생각해보니 씨발 진짜! 양심도 없는 년이 왜 나한테 지랄이야? 나는 H를 밀쳐내며 일어났다.
매고 있던 스카프를 풀어 깔깔대는 C의 목에 걸었다. 옜다 이년아, 이것도 니가 좋아하는 명품이야. 다시 한번 모세의 기적처럼 양복쟁이들이 갈라졌다. 그들 너머 Y가 웃고 있었다. 나는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살려면 돈을 내. 집이 없으면 죽든가.
지난 7월, 글모임인 와사비 라이팅 클럽에 참여하며 썼던 엽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