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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주식에 흔들리며, 삶의 수업료 치렀다

7장. 두려움은 내 삶을 바꾸라는 신호였다(7-2)

by 빼어난 별

돈 앞에서 무지했던 시간은 내 삶의 가장 큰 수업료였다.

집을 옮겨 다니고, 주식을 붙잡았다 놓으며, 나는 두려움 속에서 배워야 했다.

그래서 집에서도, 주식에서도 숱하게 흔들리고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부동산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정말 아무것도 모를 때, 2013년 전세대란이 터졌을 때였다. 그때 대출금리는 3~5%였고, 신축 빌라보다 허름한 집들이 오히려 전세가 더 비쌌다. 결혼을 하고 이사하려 했지만 모아둔 돈은 없었고, 하우스푸어(집은 있는데 빚에 허덕이는 사람)라는 단어가 쏟아지던 시절이었다. 뱃속에는 첫 아이가 자라고 있었고, 아기가 생기니 이사 다니지 않고 깨끗한 집에서 정착하고 싶었다. 그래서 몇 달 동안 임신한 몸을 이끌고 주말마다 집을 보러 다녔다. 양가 도움은 전혀 없었고, 결국 3천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우리도 하우스푸어를 강행했다. 무지했기에 가능한 용기였다.


엘리베이터 있는 작은 신축 빌라. 아이를 낳고 외벌이로 대출 이자를 갚고 생활비를 쓰다 보니 매달 마이너스 인생이었다. 빚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늘 마음이 조여왔다.


첫아이를 낳을 때도 쉽지 않았다. 12시간 진통 끝에 나오다 속골반에 머리가 끼고, 뱃속에서 태변까지 봐서 결국 제왕절개를 하자는 결론이 났다. 세상 무너지듯 울었다. 내 힘으로 낳고 싶었는데, 못했으니까. 한편으론 수술비 걱정까지 들었다. 애 낳고 기진맥진한 몸으로 영양제 하나에 10만 원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괜찮다고 거절했던 그 순간이 아직도 사무친다. 그 돈이 뭐라고, 그때는 그냥 나를 위해 써도 되는 거였는데. 실손보험은 안 됐지만, 생명보험에 있던 수술 특약 덕분에 80만 원이 나왔다. 그때 처음 알았다. 같은 수술인데도 보험마다 이렇게 다르게 적용될 수 있다는 걸. 그 순간, 보험이 얼마나 요긴한지, 그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아이는 내 손으로 키우고 싶었다. 핏덩이를 어디 맡길 수도 없었고, 멀리 있는 양가 부모님께 힘을 빌릴 생각도 못 했다. 내가 선택해 낳은 아이, 힘겨워도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인터넷뿐이었고, 블로그를 키워 체험단을 시작했다. 생필품을 받아 후기를 쓰며 생활비를 최대한 아끼며 이어갔다.


그러던 중 교통호재는 곧 집값으로 직결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투자자들은 이미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이건 빌라에서 탈출할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사실 빌라는 살수록 똥값 된다는 말을 들으면서 늘 '구멍 난 항아리에 물 붓기' 같다고 느끼고 있던 때였다. 신랑과 나는 부동산에 집을 내놓고 발 빠르게 새 집을 알아봤다. 다행히 엘리베이터 있는 빌라라 시세보다 천만 원을 더 받고 바로 팔 수 있었다.


그리고 아파트. 내 생애 첫 주택을 마련할 때(빌라는 첫 주택으로 포함 안됨), 국가에서 해주는 대출을 결혼 6년 차까지 고정금리 2% 초반으로 받을 수 있었다. 그때가 딱 한 달 남은 시점이었는데, 해가 넘어가면 못 받는 상황이었다.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며 대출 막차를 타게 되었고, 우리는 2020년 1월에 이사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달 뒤, 부동산은 미친 듯이 폭등했다. 우리 부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영영 이사 못 했을 거라고.


그 무렵 신랑 직장 문제 등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잘 버텼고, 그 덕에 지금의 단단한 우리 부부가 있는 것 같다. 그때부터 조금씩 '점프'하자는 마음으로 부동산 공부도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시작할 타이밍은 거품이 빠질 때였다. '확실히 느꼈다, 지금이 기회다.'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여러 유료 강의를 들으며 인사이트를 키워갔다. 1년쯤 공부하면서 눈 오나 비 오나 임장 다니고, 여행 가서도 시세를 보며 입지를 체크하는 습관이 생겼다.


부동산 공부하면서 알았다. 한국 사회가 부동산에 얼마나 기대고 있는지, 정책과 시장이 어떻게 사람들의 삶을 흔드는지. 그 양면을 똑똑히 보았다.


부동산은 분명 돈이 열리는 나무처럼 보였다. 하지만 너무 빨리 손을 뻗으면, 그 나무가 열매 대신 가시를 내밀 수도 있다. 나는 아이들까지 고생시키며 그 가시에 찔리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고, 왠지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결국 부동산은 아쉽지만 아직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닿았다. 분명 또 한차례 격차가 벌어질 것이다.


주식도 마찬가지였다. 단타도 해보고, 주식 채널에서 추천한 종목도 사봤다. 그런데 제대로 모르고 사니, 떨어지면 불안했고 오르면 서둘러 팔았다. 결국 손실이 남았다. 다행히 적은 금액이라 견딜 수 있었지, 큰돈을 넣었더라면 벌서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주식 선배라던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유 모른 채 사고팔며 시장 흐름을 놓치고 있었다. 오히려 부동산 공부 덕에 내가 운 좋게 시장을 보는 눈을 키워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무지에 대한 두려움은 배움의 수업료라 여겼다. 매일 시장을 지켜보니, 조금씩 흐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식은 결국 잘하고 못하고의 차이가 아니라, 매일 밥 먹듯 지켜본 사람이 흐름을 잡는다. 시장이 좋을 때만 뛰어드는 게 아니라, 조용할 때도 꾸준히. 나는 늦게 시작했지만, 코로나 급등장부터 거품과 하락, 다시 조금씩 올라오는 장까지 함께 지켜보며 공부했다. 처음엔 개미발톱만 한 돈으로 사고팔며 흐름을 익혔고, 1년 동안 평균 18% 수익을 냈다. 은행 적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익이었다.


신랑에게 신나게 자랑했다.

"이것 봐, 나 올해 18% 수익 냈어!"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오~ 거기다 0 하나만 더 붙여봐."


순간 웃음이 멈췄다. 대단하다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는데, 그 말이 괜히 서운했다. 서운함은 곧 부글부글 끓는 속앓이가 됐다. 속으로 다짐했다. 두고 보자. 노력의 흔적은 안 보고 결과만 보려 하네. 세상도 다 그렇겠지.


그 후론, 고정배당과 수익이 더 크게 나자, 신랑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제는 나보다 더 주식창을 들여다본다. "팔까? 고점 같은데?" 하고 묻는다. 나는 말한다. "가격이 아니라 트렌드를 봐야 해. 숲도 보고 나무도 보고. 금값, 달러, 부동산, 주식 다 연결돼 있어. 공부 계속해봐." 나도 모르면서 알려주듯 말하지만, 덕분에 같이 배우고 있다.


지금은 정말 신랑 말대로 0 하나 더 붙은 수익을 내고 있다.

역시 나다! (자화자찬은 자존감을 키운다. 하지만 겸손은 잊지 않는다.)


세계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다. 영원한 상승은 없다. 그래서 더더욱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코로나 때보다 돈은 더 풀려 있고, 돈의 가치는 더 빨리 녹아내리고 있다. 직장만으로는 생계를 지탱하기 버겁다. 돈이 행복을 주진 않지만, 없을 때의 불행은 더 선명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달린다.

돈을 좇는 게 아니라, 돈 앞에서 무지하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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