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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음의태양 Aug 28. 2020

누룽지와 운짱 아빠의 고백

함께하는, 같이하는 가사


“내가 설거지 도와줄까?”


저녁식사를 하고 설거지를 하는 아내에게 내가 했던 말이다.

그런데 아내가 갑자기 날카롭게 반응했다.

“도와주는 게 아니라 같이 하는 거라고! 요즘 나오는 ‘함께하는 가사’라는 공익광고 못 들어봤어?”

 .....


 “잘됐네, 그럼 내일부터 당신이 운전해서 애들 데려다주면 되겠네...”


요즘은 별게 다 부부싸움의 이유가 된다.


내가 매일 아침 누룽지를 끓이게 된 것은 아내가 육아휴직을 끝내고 복직을 하면서부터이다.

양가의 부모님이 모두 지방에 계신 터라 육아에 특별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아내의 휴직으로 버텨가며 생활을 하다가 이래저래 총알이 다 떨어진 상황이었다. 

아이들을 새벽잠을 깨워 초등학교와 어린이집에 보내야 하고 출근을 서둘러야 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첫째 아이는 아침 돌봄으로, 4살인 둘째 아이는 7시 반부터 어린이집으로 가게 되었다.

식사도 거르고 그 이른 아침부터 아이들을 보내야 하는 게 안타까워 궁리 끝에 내가 아침에 누룽지를 하게 된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지금은 아이들이 자란 만큼 처음에 끓이던 냄비보다 더 큰 냄비로 끊이게 되었고, 저녁에 밥을 미리 눌러놓고 아침에 물만 부어주는 루틴으로 바뀌었다. 회식이 있어 늦게 술에 취해 들어와도 하루도 아침에 누룽지를 걸러준 적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오히려 나와 아내가 아침식사를 하는 버릇이 생겨나서 타깃 고객과 주 고객이 바뀐 것이 처음과 달라진 점이다.

매일 간단한 아침식사 후, 운전을 잘 못하는 아내를 대신해 첫째와 둘째를 차례로 내려주고, 다음으로 아내의 직장에 내려주고 내가 출근하는, 네 식구가 한 차로 출발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다행인 것이 아내가 복직할 무렵, 촌각을 다투어 무엇을 해내야 하는 업무의 부서에서 다소 그렇지 않은 부서로 내가 인사이동이 되어 그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아이가 아프거나, 나 또는 아내 한 사람이라도 아픈 날이면 이런 일정은 말 그대로 STOP이다. 

특히 내가 아픈 날이면 누룽지와 운전 셔틀은 중단된다. 그래서 아파도 미션을 완수하고 아파야 했고, 치료도 최대한 강하고 짧게 완료했다.


그래서 부부싸움을 할 때, 내가 마지막에 쓰는 최대의 무기는 ‘내일부터는 당신이 운전해서 해라’라는 거의 협박성의 말로 귀결되었다. 


‘내가 설거지 도와줄까’라는 말로 부부싸움을 했다는 말에 사무실 후배들이 피식 웃었다.

“참 힘들게 사시네요..”하며 조롱인 것인지 위로인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아내가 비단 그 말 때문에 화를 냈겠는가. 생각하고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하였다. 

내가 설거지를 하면 깨끗하게 안되어 어차피 아내가 다시 해야 되는 일이 많은데, 어차피 본인이 다시 할 것을 선심 쓰듯 도와줄까라고 물어보는 게 곱게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해는 했다. 

맞벌이 부부, 엄마라는 굴레, 철부지 남편의 아내라는 역할은 버겁고 힘들다. 특히 육아에 대한 부담은 오롯이 엄마한테 넘겨질 수밖에 없는 현실도 난감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남편이 고집이 세고, 이해심이 박하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면서도 “함께하는, 같이하는 가사”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너무 얄밉게 느껴졌다.

‘그렇게 공공연히 유난 떨지 않아도 이미 함께하고 있다고...’

이렇게 뇌리에 꽂히는 공익광고 캐치프레이즈나 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을 보면서 싸우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한없이 다정다감한 남자 배우들. 육아의 귀신이 되어버린 아빠들.

그네들에게 예전의 아버지 세대의 과묵하고 위엄 있는 권위로 통하는 가부장의 지수는 거의 제로이다.

쉴 새 없이 입을 나불거리거나, 여자 주인공의 비위를 끊임없이 맞추거나, 아니면 키가 크고 잘생겼거나.

현실에도 저런 남자들이 많을까. 정말 있기나 한 것일까. 아니면 주요 시청자들인 여성들의 대리만족을 위한 방송에서의 포퓰리즘적 설정인가. 그런 미디어의 현실 조장이 참 한심하게 느껴졌다. 

예능이나 드라마에서 전통적 개념의 가부장적인 남성은 없다. 오히려 그런 문화에 대한 혐오만 느껴질 뿐이다. 


TV 속의 이미 중성화된 남성성은 현시대의 남성들에게 괴리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또 그렇게 살아야 함을 은연중에 강요하고 있다.

물론 고정화된 이분법적인 개념의 남성성/여성성의 굴레를 씌우자는 것은 아니나, 왠지 불편하다.

인기 있는 드라마 남자 주인공은 마치 순정만화에서 나오는 긴 앞머리로 눈을 반쯤 가린 귀공자들이 그냥 드라마 속에서 나오는 듯한 느낌이다. 마치 여자 아이돌에 한 눈 파는 남편을 보는 아내의 눈 흘김 만큼이랄까.

채널을 돌리고 싶지만 이미 그분이 시청을 하고 계시다.


비슷하지만 다른 이유로, 나는 아빠가 나오는 육아 프로그램을 잘 보지 않는다.

처음에 몇 쌍둥이가 나오는 그 프로그램을 몇 번 본 적이 있으나, 너무 현실감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아이들에게 붙어있는 가사도우미가 몇 명이라더라, 아이들의 폭풍 먹방을 위해 그전에 배를 무지 고프게 한다더라..라는 말들이 나돌았다.

그 아이들이 입은 옷과 장난감은 무지 고급스러웠다. 다 협찬인 것이다.

아이들은 은연중에 영어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면 그럴 것이지.’ 실소가 나왔다.

그런 현실과 맞지 않는 아빠 육아 프로그램은 정말 혐오스러울 정도였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배우는 아이가 흠이 아니라 그런 아이가 잘 없다는 게, 그런 환경이 잘 없다는 게 흠일 것이다. 


떡진 머리, 무릎이 나온 바지, 피곤에 절어있는 일상의 표정 이런 보통의 육아를 하는 아빠들은 그런 방송에 나오지 않았다. 육아용품 하나를 구입할 때에도 할부를 몇 개월씩 고민하는 모습은 방송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 괴리감에 나는 채널을 돌렸다. 


하지만 알면서도, 그 부러움의 욕망이 현실에 반영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날이면, 그날은 어김없이 부부싸움으로 이어지곤 했다.

“남자가 저래야지..” “저렇게 좋은 아빠들이 많다니까..”

“....”


‘그럼 저 남자랑 결혼하지 그랬어..’

마스크를 주워 쓰고, 복화술로 주절주절 해본다. 눈따로 입따로.


어쩌다가 ‘함께하는 가사’라는 내용의 광고가 나오게 됐고, 그게 왜 내 마음속에서 불편한 감정을 일으키는지까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남성이 가사를 잘 돕지 않는다라는 전제, 그리고 그 남성들의 아버지는 밖에서 일을 한다는 이유로 가사는 대부분 어머니가 도맡아 해야 한다고 보고 배워왔다는 전제, 그리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 세대는 술을 먹고 항상 그 어머니의 어머니를 때리고, 도박판을 돌아다니며 정작 가사에 도움을 주지 못했던 세대라는 설정에서, 그런 광고의 기획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말처럼,

할머니, 어머니 세대의 질곡이 심하여 주로 딸들이 목격자이자 피해자로 그 원한을 갖고 사는 되물림이 계속된다.


아직도 한국사회의 여성이 절대적인 약자라는 것은 주지할만한 사실이다. 또한 가부장제라는 문화적인 구속성에 대해서는 인정을 할 수밖에 없다. 때론 그 문화가 일방적이고 폭력적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언제나 남성이, 특히 현시대를 이해하고 제대로 살아보고자 하는 남성까지도, 일종의 가해자로 몰아세우는 인식은 가끔씩은 꼬집고 싶을 때가 있다.

가해자가 아니니, 남성도 피해자다, 라는 것을 단순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페미니즘이라 하며 배척하지 않고, ‘김지영’씨와 실제 생활하며, 공감하는, 그리고 조금이라도 변화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남성들이 우리 사회에는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주인공인 ‘김지영’씨의 남편도, 현시대를 열심히 살아가는 가장으로서, 그도 또한 일방적이고 전통적인 가부장적 문화의 피해자일 수 있다는 생각도 종종 들기 때문이다. 


시대의 정신인지 공감의 실천인지, 공익광고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주변에는 정말 ‘함께하는’ 가사를 실천하는 분들이 많아지긴 했다. 물론 그 ‘함께’와 ‘같이’의 정도는 세대에 따라 나이에 따라 사정에 따라 다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내 주변에는 그런 남성성/여성성의 역할의 굴레에 굳이 메이지 않고, 내 가족이기에 나의 아이이기 때문에, 고생하는 내 아내이기에 ‘함께하는 가사’를 이미 실천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사진출처 : https://www.newspim.com/news/view/2019101000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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