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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음의태양 Sep 16. 2020

나도 서민 빌라 사람이었다.

구별짓기와 버티기 사이에서

얼마 전, 유명하지도 않은 ‘듣보’ 공인이 온라인 게시판에 올린 말로 구설에 올랐다.

“우리 아파트에는 서민 빌라촌 아이들이 몰려와 마스크도 없이 뛰어놀고 있다 얘들아 마스크 좀 써..” 

후에 논란이 되자, 이 분은 아이들이 걱정돼서 글을 올렸다고 했지만, 얼마 전까지 ‘빌라 서민’으로 살고(지금도 서민이다) 옆 아파트 놀이터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놀았던 내게는 썩 달갑게 들리지 않는 발언과 어색한 변명처럼 들렸다. 


서울에서 일을 하던 내가 경기도로 발령을 받고 나서, 다시 서울로 이사를 결심하게 된 것은 결혼할 아내의 직장 근처로 이사하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나는 안산에서 자취를 하며 일을 했다. 그런 내가 조금만 더 이를 물고 서울로의 출퇴근에 시간을 쏟으면, 그래도 집 근처에서 다니는 아내를 위해서는 낫겠다고 판단을 했다. 


스물일곱에 휴학 한번 하지 않고 대학을 졸업해서, 첫 직장을 잡았다. 그리고 약 10년 동안 모은 돈으로 서울 끝자락에 20평대 오래된 작은 아파트의 전세를 겨우겨우 발품을 팔아 얻게 되었다. 

자연스레 2년 뒤 전셋값이 올랐고, 그간 모았던 돈으로 겨우겨우 오른 전셋값을 충당했다. 그러나 아이가 생기게 되면서부터는 오른 전셋값이 감당이 되지 않았다. 입이 늘어난 것도 맞지만, 아내의 휴직과 겹쳐 외벌이로는 도저히 전셋값 상승분을 내기는커녕, 월급이 고스란히 생활비로 겨우겨우 버티는 상황이 되었다. 은행에 대출을 받을까 고민하던 차에, 부모님이 빌려주셔서 겨우 돈을 마련하였다. 


생각해보면 그 아파트와는 정이 많이 들었다. 

이전 세입자가 지저분하게 쓰던 집을 잘 쓸고 닦아 신혼집을 꾸몄고, 그곳에서 첫 아이를 낳아 기른 곳이다. 아이의 출생신고란에 본적지를 적는 란이 있었는데, 잠시의 고민 끝에 현주소인 그 집 주소를 적을 만큼 우리에게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그 아이와 전혀 관계없는 그 주소를 왜 본적지로 적어 아이가 평생 갖고 살아야 할까라는 생각에, 후회가 남는 부분이기도 하다)


전세였지만 그래도 서울의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게 어느 정도 안정감이 생길 무렵이었다. 

아이가 5살이 되기 전 겨울에 우리는 아이의 유치원 원서를 써서 이곳저곳에 접수를 했다. 그 당시 아내와 나는 모든 5살의 아이가 유치원에 가는 줄 알고 있었다. 지금은 많이 늘어난 국공립 어린이집도 없어서 4세까지만 어린이집을 다녀야 했고, 아이의 친구들의 부모처럼 우리도 유치원에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처음 알았지만 유치원도 추첨을 통해서 들어간다는 것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반차와 휴가를 내어 집 근처 여기저기 유치원에 원서를 넣고 추첨을 했지만, 번번이 나는 탈락하였다. 심지어 후보 순위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집과는 거리가 있지만, 되게 괜찮다던 유치원에 아내가 추첨을 하여 덜컥 된 것이었다. 

그때 둘째를 임신하고 있던 아내는 추첨이 되어 기쁜 마음에, 추운 겨울에, 적지 않은 거리를 걸어서 왔다고 했다. 

그런데 기쁨의 마음도 잠시, 우리가 그 유치원에 어떻게 보낼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시작되었다.


아내는 운전을 하지 못한다. 그 유치원은 차로 10분 정도 되는 거리에 있다. 유치원에는 셔틀버스도 없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재계약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 유치원은 아침 보육도 되지 않고 오후에는 일찍 마친다. 그 유치원 근처의 아파트는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의 전세금을 빼더라도 절대 갈 수 없었다. 


아내와의 끝없는 대화.. 때로는 언성 높임. 때로는 침묵들의 과정을 번복하며

지금 같아서는 절대 하지 못할 결정을 그때 해버렸다.

(사실 그동안 대부분의 결정은 아내의 의지대로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유치원 근처로 이사를 하자,

유치원의 시간(10시~오후 2시) 이외의 보육은 그럼 어떻게?


결론적으로 우리는 유치원 근처의 빌라를 찾게 되었고, 둘째를 임신했던 아내가 출산과 함께 휴직을 연장하여 첫째의 유치원 이외의 시간을 보육을 하겠다라는 지점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유치원 근처의 빌라에 우리는 이사를 하게 되었고, 심지어 전에 살던 아파트 전셋값에 돈을 더 얹어서 빌라로 이사하는 도전을 감행했다.

시골에 사시는 부모님의 반대도 있었다. 그래도 아파트가 낫다. 집 근처 유치원은 안 되냐 등등.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굳이 그런 결정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아이 키우는 것에 서툴렀고, 첫 아이라 아무래도 교육에 대한 욕심도 있었을 것이다. 누가 봐도 되게 괜찮아 보이던 유치원이었으니까. 그리고 유치원 추첨이 된 곳은 그곳뿐이었으니.


이사가 결정되고 부동산 계약을 한 이후에, 전에 추첨이 되지 않아 떨어졌던 유치원들에서 추가 접수를 받는다는 전화가 여기저기에서 왔다. 근데, 근데, 너무 늦었다. 

정말 이제는 아이 유치원 교육 때문에 이사하고 휴직을 늘린 유별난 부모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 아파트를 이사 나가던 날, 짐을 뺀 아파트에 다시 들렀을 때는 그동안의 추억들이 회오리쳐 한동안 눈물이 차오르기도 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울의 ‘빌라 서민’이 되었다. 

전에 살던 아파트보다는 조금 넓었지만, 둘째 아이까지 태어나 아이들 짐이 늘어나니 좁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둘째가 백일이 되었을 때, 아내는 백일상을 집에서 손수 준비하고, 시골의 부모님을 모셔와 사진을 찍었다. 

아버지는 집에 오시지 얼마 되지 않아 ‘집에 앉을 데도 없다’하시며, 또 마음 한켠을 아프게 하셨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부모의 마음은 오죽했겠는가 싶다.


그런 부모님의 마음을 더 후벼 팠던 다른 사건들이 있었다. 

가족 모임으로 시골에 내려가서 저녁을 먹을 때의 일이다. 

대게 지방에 사시는 분들은 서울의 삶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왜 지방의 아파트 한 채 값으로 서울의 전세를 사는지, 왜 그 비싼 월세를 내며 작은 집에 사는지, 이해가 안 될 것이다. 나도 처음엔 그랬으니까.

부모님과 형이 서울에서 고생하지 말고, 경기도 쪽으로 나오면 어떻겠냐는 물음에, 나는 술에 취해 이상한 답을 하고 말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건 주변에 철딱서니 없는 사람들이었다. 

부모의 도움으로 큰 노력 없이 서울에 집을 마련하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며, 아이를 좋은 교육을 시킨다고 하는, 그래서 나와 내 아이는 너희와 다르다는 표시를 여기저기 내고 다니던 사람들이 뇌리에 스쳐갔다. 그리고 나의 대답은 이렇게 이어졌다.


-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에서 대학 다니며, 대학 때도 정말 치열하게 살았다. 그래서 대기업도 입사하고 여기까지 왔다. 별 고생 없이 부모 도움으로 서울에서 편히 사는 놈들 천지인데, 그런 놈들에게 밀려나가는 것 같아서 그건 내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여기서 버티는 거라고.


틀린 말은 아니나, 이 말을 듣는 대상과 장소가 적절치 못했다.

그것도 부모님과 형 앞에서 내가 할 말이 아니었다.

마음속 깊이 있던 교만한 밑바닥의 말들이, 술기운에 삐져나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장소는 형의 집으로 이동되어 있었고, 형이 정신 차리고 살라고 등짝 스매시를 날리고 있었다. 

그 후 한참 동안 나는 부끄러움에 머리를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대학에 다니면서부터 서울에 홀로 올라가 고생하는 막내아들이 저런 삐뚤어진 말을 하는 것을 듣는 부모님의 마음도 편치 않았을 것이다. 


또 한 번은 아내가 둘째를 출산하고 산후조리원에 있을 때의 일이다.

첫째 아이의 유치원 등. 하원을 잠시 어머니가 올라오셔서 맡아 주신 적이 있다. 유치원을 하원 하면 놀이터에서 같은 유치원 친구들과 아이를 놀게 해 주었는데, 어머니께서는 아이를 위해 사셨던 마이*(캐러멜)을 같이 놀던 친구들에게도 한 개씩 주셨다고 한다. 

잠시 후, 그 아이들의 엄마들은 우리 아이에게 와서 보란 듯이 ‘유기농’ 과자를 건네주었다고 한다. 마치 우리는 ‘이런 것’만 먹인다는 표식처럼.


그날 저녁, 어머니는 속상한 표정으로 ‘너네 이 동네에 잘 못 온 것 아니냐’는 말씀을 하셨다.

내가 없어 보이니 생각이 거기까지 닿은 것인지, 아니면 과자를 건넬 때의 이상 야릇한 분위기를 감지하신 것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다만 지방 분이시더라도 30년 가까이 직장 생활을 하셔서 경험이 많으신 어머니가, 아예 틀린 말씀을 하시진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유치원 아이들의 주소록에 적힌 주소 중, 우리 집 아이의 집주소만 ‘아파트’가 아닌 다른 도로명 주소였다고 한다. 

아이가 좋아하는 그 아파트의 놀이터를 가려면, 입주민만을 위해 비밀번호를 눌러야 들어갈 수 있다는 것에 어머니는 충격을 받으셨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이후에도 아이가 그 엄마들 틈 사이에서 ‘은따’를 당하는 것을 보시고 고향에 내려가셔서 많이 속이 상하셨다고도 하셨다. 


서울에서 10년 정도 일하고 정상적으로 돈을 모아 아파트 전세 이상을 살려면, 부모나 은행의 도움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 

적어도 맞벌이도 아니었던 그 엄마들의 무리가 ‘우리는 너희와 다르다’는 구별 짓기의 자격이 과연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찌 됐든, 서울 한 구석에서 아등바등 사는 모습을 직접 보신 어머니는 본인의 노후자금의 일부를 헐어 놀이터가 딸린 아파트에 내가 살 수 있게 도와주셨다. 

결론적으로 나도 내가 욕하던, 노부모의 도움으로 사는 철딱서니 부모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이제는 그 아파트에 놀이터에서 더 이상 ‘빌라 서민’으로 눈치 보며 아이들과 놀지 않게 되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는 문화가 부끄러운 것이다. 

빌라와 아파트는 그렇게 다른가.

서민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얼마나 다른가.

우리나라에는 언제부터 서민과 그렇지 않은 부류의 계급스런 계층이 있어왔던가.

우리는 너희와는 다르다고 구분 짓기 전에 그럴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봐야 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서울의 빌라 서민이 되었고, 이제는 은행 채무자-서민이 되었다.


그런 구별 짓기의 오만함과 버티기의 교만함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서울에 살고 있다.


사진출처 : http://m.apt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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