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함과 찐함 사이에서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의 키리시마의 부재로 본 현대사회

by 심준경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는 학교 내부의 다양한 학생들이 겪는 심리적 갈등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그 갈등의 핵심에는 뚜렷하게 드러나는 계급 구조가 있다. 영화는 잘 나가는 ‘인싸’와 소외된 ‘아웃사이더’를 선명히 대비시킨다. 예를 들어, 제목 속 인물인 키리시마는 모두가 선망하는 인싸다. 매력적인 리사와 사귀고, 배구부 주장으로 학교 내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다. 반대로 영화의 한 축을 이루는 마에다는 계급의 아래쪽에 있다. 복도에서 누군가와 부딪혀 잡지를 날라가도 건성으로 ‘미안’ 한마디만 듣고, 스스로 잡지를 주워야 하는 처지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경제적 재화의 의미로만 사용되던 자본의 개념을 '사회적 경쟁에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과 에너지'로 확장하였다. 자본에는 모든 사람이 선망하는 자본이 있고, 특정한 장에서만 선망되는 자본이 있다. 이 학교에서 널리 통용되는 자본은 남성들에게는 '강함'이며, 여성들에게는 '매력'인 듯하다. 히로키는 강함, 잘생긴 외모, 스포츠에서의 유능함을 겸비하여 학교에서 두루 인정받는 존재다. 그의 여자친구인 사나, 그리고 키리시마의 여자친구인 리사는 매력이 두루 인정받는 학생으로, 학교 계급 내부의 상위를 차지한다. 이러한 인정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일, 그런 행동이나 태도는 사람들 사이에서 '쿨'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반면에 자신이 속한 특수한 맥락에서만 사용 가능한 자본이 있다. 마에다는 학교 전체에서는 쉽게 무시당하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학교의 영화부 내에서는 영화와 관련하여 방대한 지식을 쌓은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또한 취주악부 부장인 사와지마 또한 다른 곳에서는 튀는 사람이 아니다. 오로지 취주악부 내에서만 인정받는다. 그러나 이와 같은 특수한 맥락에서의 인정되는 자본은 다른 맥락에서는 쉽게 인준되지 않는다. 오히려 마에다 같은 경우, 마이너한 영화를 모두 꾀고 있다는 특징이 되려 무시할만한 요소로 다른 곳에서 비추어지기도 한다. 사회에서 쉽게 통용될 수 있는 자본이 아닌 다른 활동에 몰두하는 것은 우스운 일로 여겨지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활동에 대한 '찐한' 애정은 사람을 '찐따'로 여겨지게도 만든다.

이런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결국 선택의 기로에 선다. 내가 원하는 나로 살 것인가, 아니면 인정받는 나로 살 것인가. 영화 속 동아리 활동은 바로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상징하는 장치다. 내가 좋아하는 활동에 ‘찐한’ 애정을 드러낼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숨기고 학생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쿨한’ 태도를 택할 것인가.

리사, 사나와 어울리는 카스미는 '찐함'보다는 '쿨함'을 선택한 사람이다. 그것도 자신의 절친인 미카마저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반면, 미카는 '쿨함'을 선택했지만, 끝내 '찐함'을 숨기지 못하는 인물이다. 친구들과 모두 모였을 때에는 동아리 활동을 하는 이유가 단순히 내신 성적을 위해서라고 둘러대지만, 절친 카스미와 둘이 있을 때에는 자신의 진짜 열정을 드러내고 만다.

배드민턴 스매싱을 잘하는 카스미의 팔뚝을 만지며 팔뚝이 두꺼워서 스매싱이 다르다며, 감탄한다. 자신은 왜 그런 스매싱을 하지 못할까 하는 마음이 절절히 드러난다. 동시에 배구 동아리 후스케를 남몰래 흠모하는 마음을 드러낸다. 후스케는 키리시마의 빈 자리를 채워 팀에서 리베로를 맡은 키 작은 학생이다. 키는 작지만, 리베로 자리를 채우기 위해 열심히 연습한다. 미카는 그런 후스케를 흠모하는 마음을 카스미와 대화를 하다가 드러내게 된다. 후스케가 키리시마의 빈 자리를 채우지 못해 팀이 진 것에 슬픔을 드러내며, "뭘 위해 열심히 한 걸까?"라는 말을 한다. 그러다가 미카는 "모르겠지, 카스미는 이런 기분 따위"라고 말하며, 자신이 이런 마음을 드러낸 것을 후회하는 말을 한다.

그러나 미카는 절대로 그런 말을 꺼낸 것에 후회하지 않아도 되었다. 카스미는 절친인 미카도 전혀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자신의 '찐함'을 숨기고 살기 때문이다. 미카도 비웃는 마에다의 영화에 대한 열정을, 카스미는 남몰래 흠모하고 있다. 카스미는 영화 초반 리카의 무리가 모두 영화부를 비웃을 때, 혼자 웃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 비웃음이 길어질 것 같을 때에 적절히 화제를 돌리며 말을 그치게 만든다. 남자친구와 싸웠을 때에 홧김에 혼자 영화를 보았다고 했는데, 일반적인 관객이라면 절대 고르지 않을 만한 포스터의 괴수물 영화를 선택해 들어가서 마에다와 만나게 된다. 마에다와 대화하며 중학교 시절 종종 같이 대화했던 이야기를 꺼내기도 한다. 아무래도 이것만으로는 관객의 눈에 띠기에는 좀 부족하지. 영화 말미에 마에다와 배구부 사이의 충동이 생기고, 사나가 이를 즐겁다는 듯한 말투로 말하자 카스미는 사나의 뺨을 때린다. 비아냥에 손이 먼저 나아갈 만큼, 사실 마음 속으로 카스미는 마에다의 영화에 관한 열정을 흠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평상시에 카스미는 자신 마음 속의 '찐함'을 숨기고 살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쿨하게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마음속의 열정을 완전히 숨기고 살 수는 없다. 그렇기에 ‘찐함’을 접어두고 살아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이 모순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인물이 바로 히로시다. 그는 겉으로는 쿨함을 택했지만, 끝내 내면의 열정을 버리지 못해 갈등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히로시는 야구부이지만, 야구부에 나가지 않는다. 주장이 계속 시합에만이라도 와달라고 할 만큼, 야구를 잘 하지만 웬일인지 그는 야구부에 나가지 않는다. 일본 고등학교 야구부의 상징과도 같은 빡빡머리에서 어느새 머리가 자라 더벅머리가 된 그이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야구 가방을 가지고 다닌다. 영화의 마지막 씬은 그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키리시마가 떠난지 5일째 되는 화요일을 한 번 보여준 후에 그를 중심에 두고, 다시 화요일을 히로시만을 중심에 두고 보여준다. 그는 옥상에 올라가기 전, 주장과 만난다. 주장에게 3학년들은 대부분 은퇴했는데, 왜 주장은 은퇴하지 않느냐고 묻는 그. 주장은 신입 선발이 끝날 때까지라도 계속 야구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가을이 끝나가도록 스카우트 한 번 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신입 선발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는 주장. 그런 주장을 바라보는 히로시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동요가 스친다.

옥상에서 한바탕 소란이 끝난 후, 마에다의 카메라에 관심을 보이는 히로시. 마에다의 카메라는 8mm 필름 카메라였다. 히로시는 마에다에게 한 번 카메라를 봐도 되냐고 묻는다. 히로시는 카메라로 마에다를 찍어보며, 마에다에게 질문을 묻는다. 영화 감독이 될 거냐고, 배우와 결혼할 거냐고, 아카데미를 받을 거냐고.

그러나 의외로 마에다는 영화 감독이 되는 건 무리일 것 같다고 한다. 계속 필름카메라로 영화를 찍는 이유는 단지, "아주 가끔씩, 우리가 좋아하는 영화랑 우리가 찍는 영화가 연결되었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이 좋아서라고 말한다. 그런 마에다의 열정을 보고는 '쿨함'에만 마음이 가고, '찐함', 혹은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관심을 끊으려고 하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지 히로시는 울먹이며 뒤돌아선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서는 키리시마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를 받지 않는 키리시마. 다시 쓸쓸한 걸음을 걷는 히로시 뒤편의 운동장에서 야구부가 함성을 내지르는 걸 보여주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의 어느 장면에도 등장하지 않지만, 제목에까지 이름이 박힌 키리시마는 왜 이 영화의 중심처럼 보일까? 그것은 이 영화에서 모두가 하나만이라도 붙잡으려고 애쓰는 '쿨함'과 '찐함', 양자에 모두 능통한 사람이기 때문인 듯하다. 그는 영화 속 모든 이에게서 인정을 받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그가 열정을 갖고 하는 배구부에서도 중심이 된다. 동아리 활동이 별 것 아닌 것처럼 행동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동아리에 몰두한 이 영화 속 세계의 자장 속에서 키리시마는 독특한 존재다. 마에다처럼 동아리 내부의 열정에 대한 인정도, 리사와 같이 외부의 학교 전체에서의 인정도 모두 이룬 듯한 유일한 사람인 듯하다.

그러한 그가 영화 속 세계에서 사라진 채로 영화가 진행된다. 어쩌면 이 영화는 '쿨'하면서도 '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의 부재에 대한 영화로 비추어진다. 내가 원하는 것에 몰두하면서도,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기란 어려운 세상. 사회적으로 통용 가능한 자본을 쌓아 인정 받기 위해서는 내 영역을 포기해야 하는 현실. 그런 현실의 현대 사회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판타지스러운 키리시마라는 인물의 부재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모두의 인정을 받고 싶지만, 그러기 힘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카스미처럼 자신의 '찐함'을 모두 숨기고 살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마에다처럼 '쿨함'에 연연하지 않고 '찐함'에 몰두하며 살아야 하는가? 그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길이다. 인생은 너무나도 길고, 그 긴 인생 동안 그 누구의 인정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어려운 길이다. 다만, 마음 속에 '찐함'을 숨길 수 없겠다면, 자신의 열정을 숨기지 않는 길을 택했다면... 그런 사람들에게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은 마에다가 자신의 대본에 써넣은 말이 아니었을까?

"싸우자, 이곳이 우리의 세계다. 우리들은 이 세계에서 살아가야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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