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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Mar 23. 2023

학총룩 고민한다고 코웃음치지 마세요

학부모총회를 다녀왔습니다

최근 나라안팎에 큰 사건 사고가 없는 탓인지 학부모총회 패션에 대한 뉴스 기사가 눈에 띄었다. 다소 한심한 뉴스 기사 내용에 대해 브런치에서도 이에 관한 글을 몇 개 올라온걸 읽어보았다.


전국적으로 모든 학교급에서 학부모총회 시즌이라 이런 기사가 한 두개 올라올 수는 있지만, 기사제목에서부터 세부 내용이 많이 실망스러웠다.


"700만원씩은 걸치고 간다. 엄마들의 데뷔날"

"엄마들 명품백 총출동한다는 학부모총회 패션 뭐길래"

"학총룩 화제"

"저 엄마가 든 가방 좀 봐. 학부모총회가 뭐기에"


제목이 너무 자극적이다.

학부모 총회가 정식 명칭인지, 학교교육설명회가 정식 명칭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학기 초에 학교에서 실시하는 학부모총회는 학교에 아이를 맡긴 학부모들을 위해 학교 차원에서 교육의 기본방향과 목표나 각 학교만의 특색교육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아이를 맡아주는 담임선생님을 직접 만나볼 수 있는 1년에 한 번 있는 작지 않은 학교 행사 중에 하나다.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좀 자극적인 기사 제목을 달았으면 내용이라도 좀 충실하면 좋은데, 요즘 학부모들이 많이 입는 패션 스타일에 대한 설명과 함께 특정 쇼핑몰 홍보가 이어지는가 하면, "워킹맘"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의 아들 졸업식 패션에 대한 자세한 분석까지 나온다.


학부모총회에 가면 어떤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보통 어떠한 절차로 이루어지는지, 아이의 선생님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어떤 식으로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면 좋은지에 좀 더 내실 있는 내용이 기사로 나왔어야 하지 않나 싶다. 아니면 일하느라 바빠서 가고 싶어도 시간이 없어 가지 못하는 워킹맘들에게 학부모총회가 어떤 의미가 있고 굳이 가지 않아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어주면 안 되나.


나는 교사로서 이 행사를 준비만 해봤지, 학부모로서 참여한 적은 한 번도 없어서 이번 기회에 한 번 경험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담임선생님을 만나면 아이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나누면 좋을지 고민이 되어서 유튜브의 교육전문가들의 영상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그날 패션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간절기 옷 중에서 출근할 때나 백화점 갈 때 주로 입는 가장 아끼는 옷 중에 하나를 입고 가기로 했고, 가방도 아끼느라 자주 들지 않는 내 가방 중에서 가장 값어치 있는 걸로 들고 가기로 결심했다.


고백하자면 총회 전날 급하게 네일 관리라도 받아보려고 동네 네일숍에 예약 전화를 돌렸지만 다 오전은 예약 마감이었다. 이틀 전에 미리 받아둘걸 왜 이제야 내 손톱이 눈에 밟히는지 모르겠다. 네일 받는다고 누가 내 손을 바라봐주는 것도 당연히 아니고 몇 년간 손톱 네일은 받아본 적도 없지만 어쩐지 이번에는 깔끔하고 우아한 색깔로 손톱을 꾸며보고 싶었다. 아쉽게도 동네 네일숍들이 다 마감되어서 받지는 못했다.


평소에는 괜찮던 피부도 갑자기 총회날이 다가오니 왜 뾰루지가 얼굴에 덕지덕지 올라와있는지, 그것도 민망하게 코 옆이나 입가 옆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그날 따라 왜 이렇게 얼굴은 푸석해 보이는지 전날 마스크팩이라도 하고 잘걸 후회가 밀려온다. 이럴 땐 코로나 덕에 마스크로 무장하면 되니 절대 안 벗고 있어야겠다고 다짐한다.


내 아이를 하루에 5시간 이상씩 데리고 있으면서 가르치고 함께 생활하는 담임선생님을 처음으로 얼굴 뵙고 만나러 가는 자리에 평소 동네에서 편하게 입고 다니는 운동복에 운동화를 신고 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이 자리에 가겠다고 기사에서처럼 명품백을 친구에게 빌리는 엄마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궁금하다. 그저 아주 소수에 해당하는 극성스러운 이야기를 가지고 일반화해서 쓴 건 아닌가 싶다. 보통 엄마들도 나처럼 가지고 있는 옷 중에 그나마 격식 있고 점잖은 자리에서 입기 괜찮은 걸로 골라서 입는 정도일 텐데 말이다.


그만큼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크다는 방증 아닐까. 학부모총회에 가는 이유는 내 명품백을,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아이가 다니는 학교가 어떻게 생겼는지, 교실 환경은 어떻고, 아이의 책상과 사물함은 잘 정리되어 있는지, 담임 선생님의 교육 철학과 성향은 어떠한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가는 것이 크다.


아이가 1년간 함께할 선생님이고, 한창 성장하고 있는 이 시기이기에 학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하는 선생님의 영향력이 굉장히 크다. 특히나 내 아이처럼 또래에 비해 조금 미숙하고 어린아이는 선생님이 하는 말이라면 무조건 진리라고 생각하며 가감 없이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인다.


내가 학교 숙제나 활동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거나 의견을 제시하면 "그거 우린 선생님이 이렇게 하랬어.""선생님이 이렇게 해도 된댔어."라고 받아치는 아이다. 선생님이 절대신인 것처럼 복종하는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아직 사리분별이나 판단력이 성숙하지 않았으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아이는 선생님의 영향력 하에 있는 것 같다.


학부모총회라고 큰 기대를 하면 안 되고 강당에서 전반적인 학교 교육에 대한 이야기와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아이의 교실에 가서 담임선생님의 얼굴 뵙고 학급 교육 방향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게 전부다.


나의 소기의 목적은 담임선생님께 내 아이 잘 부탁드린다고 한 마디 전하는 것이었는데, 다행히 선생님 눈을 마주치고 OO엄마인데, 아이 잘 부탁드린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이고 뭔가 큰 일을 해낸 것 같아 뿌듯했다.


내가 이거 하려고 왔지. 사회성 부족하고 예민한 아이가 새로운 학년에 새로운 교실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등교시켜 놓고도 늘 살얼음판 위에 있는 기분인데, 담임선생님께 이 한마디라도 간절한 눈빛으로 전하고 오니 내 불안의 농도가 한층 옅어지는 느낌이다.


오래간만에 꺼내 신은 구두도 결국 푸른색 실내 전용 덧신으로 뒤덮여서 아무도 보지도 못했지만, 나름 신경 써서 차려입고 와서 아이의 선생님도 뵙고, 평소에 주로 편한 옷차림으로 만나던 동네 엄마들이 트렌치코트도 입고, 몸에 딱 붙는 원피스에 재킷도 입고 한껏 꾸민 모습으로 만나니 기분이 새롭다. 애 등하교 데리러 다니고, 놀이터 쫓아다니다 보면 꾸밀 일도 거의 없는데 이럴 때 신경 써서 꾸민 엄마들의 모습이 나는 보기 좋았고 정말 예뻐 보였다.


내년부터는 학부모총회에 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으니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참석이 될지도 모르겠다. 또 아이가 야무지고 알아서 척척 학교 생활을 무리 없이 잘 해낸다면 굳이 갈 필요 없는 자리이다.


기왕 간다고 한다면 엄마들에게 곱게 화장도 하고 신발장에 모셔두었던 구두도 오랜만에 꺼내 신고 가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내 아이 하루종일 맡아주시는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은 마음,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재벌 아니어도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고, 백번 천 번 인정받아 마땅한 명품백보다 고귀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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