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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여권이 당신의 인생을 결정한다면?

태어난 나라가 곧 자유의 크기다


https%3A%2F%2Fsubstack-post-media.s3.amazonaws.com%2Fpublic%2Fimages%2Fbe2db86b-7a58-4631-8984-32214d917f6e_1280x2500.heic 출처: The Economist


세계의 불평등 지도

싱가포르(Singapore) 여권을 가진 사람은 193개 국가에 비자 없이 입국할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 여권을 가진 사람은 24개 국가에만 갈 수 있다. 그 차이는 169개국. 둘 다 같은 인간이고, 같은 지구에 살고 있지만, 여권 한 장이 만드는 격차는 어마어마하다.


2025년 헨리 여권 지수(Henley Passport Index)가 보여주는 현실이다. 이 차트는 단순한 여행의 자유가 아니라 기회의 불평등을 보여준다. 어디서 태어났느냐가 당신이 공부하고, 일하고, 살 수 있는 곳을 결정한다. 재능도, 열정도 아닌, 출생지가 인생의 한계를 정한다.


돈 있는 나라의 여권, 돈 없는 나라의 족쇄

부유한 나라일수록 여권 파워가 강하다. 고소득 국가(High-income countries)의 국민들은 대부분 150개 이상, 많게는 190개 이상의 국가에 자유롭게 갈 수 있다. 일본(190개), 한국(190개), 미국(180개), 영국(186개) 모두 고소득 국가다.


반면 저소득 국가(Low-income countries)의 국민들은 대부분 50개 미만의 국가에만 접근할 수 있다. 시리아(26개), 이라크(29개), 아프가니스탄(24개). 이들 국가는 분쟁, 정치 불안, 경제 붕괴로 고통받고 있고, 그 국민들의 여권은 세계에서 가장 약하다.


여권 계급구조는 경제 계급구조를 정확히 반영한다. 그리고 그것을 강화한다.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은 해외에서 공부하거나 일할 기회를 얻기 어렵다. 비자를 받기 위해 복잡한 서류와 높은 비용을 감수해야 하고, 거부당할 확률도 높다. 기회의 문은 애초에 닫혀 있다.


아시아의 부상, 서구의 추락

흥미로운 건 변화의 방향이다. 10년 전만 해도 미국과 영국이 세계 최강의 여권을 가지고 있었다. 2014년 미국, 2015년 영국이 1위였다. 하지만 2025년, 미국은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영국도 6-8위까지 떨어졌다. 헨리 여권 지수 20년 역사상 미국이 톱10에서 탈락한 건 처음이다.


반면 아시아는 급부상했다. 싱가포르가 1위를 차지했고, 일본과 한국이 2위에 올랐다. 아랍에미리트(UAE)는 10년 만에 42위에서 8위로 34계단 상승했다. 중국도 2015년 94위에서 2025년 60위대로 올라왔다.


이 변화는 경제력과 외교력의 변화를 반영한다. 아시아 국가들은 강력한 경제 성장과 적극적인 외교 협력을 바탕으로 비자 면제 협정을 늘려왔다. 반면 미국과 영국은 이민 정책 강화, 고립주의 경향, 상호주의 약화로 인해 여권 파워가 약해졌다. 트럼프 행정부는 12개국 국민의 미국 비자 발급을 전면 금지했고, 36개국(대부분 아프리카)을 추가 제재 대상으로 고려했다. 미국 비자 신청에는 250달러(약 35만 원)의 '비자 무결성 수수료'가 추가됐다.


이동의 자유는 새로운 화폐다

21세기에 이동의 자유는 새로운 형태의 화폐다. 좋은 여권을 가진 사람은 글로벌 인재 시장에 접근할 수 있고,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더 나은 삶을 선택할 수 있다. 약한 여권을 가진 사람은 그런 선택지 자체가 없다.


중간소득 국가(Middle-income countries)의 위치가 흥미롭다. 터키(Turkey)와 중국은 100개 안팎의 국가에 접근할 수 있다. 말레이시아(Malaysia)는 약 180개로 미국과 비슷하다. 러시아(Russia)는 약 110개 수준이다. 이들 국가는 경제가 성장하면서 여권 파워도 조금씩 강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선진국과는 큰 격차가 있다.


한국 여권, 세계 2위의 의미

한국은 190개 국가에 비자 없이 갈 수 있어 일본과 함께 세계 2위를 차지했다. 1960년대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던 나라가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여권을 가진 나라가 됐다. 경제 성장, 민주화, 적극적인 외교가 만들어낸 성과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한국인에게 동등한 기회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여권이 강해도 경제적 여유가 없으면 세계를 여행하거나 해외에서 공부할 수 없다. 여권 파워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럼에도 강한 여권은 최소한 선택지를 열어준다. 약한 여권은 선택지 자체를 닫는다.


보이지 않는 불평등의 벽

헨리 여권 지수는 전 세계 227개 국가와 영토를 대상으로 199개국의 여권을 평가한다. 데이터는 국제항공운송협회(International Air Transport Association, IATA)의 출입국규정 조회 시스템(Timatic Web)에서 가져온다. 이 지수는 단순한 순위가 아니라 세계 권력 구조의 스냅샷이다.


1위와 꼴찌의 격차는 169개국. 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기회의 격차, 미래의 격차, 존엄의 격차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난 젊은이가 아무리 뛰어나도, 해외 유학을 꿈꾸기 어렵다. 시리아 난민은 비자를 받기 위해 몇 년을 기다려야 한다. 이라크 과학자는 국제 학회에 참석조차 힘들다.


이동의 자유, 부자들만의 특권인가

만약 이동의 자유가 기회의 새로운 화폐라면, 우리는 그것을 충분히 현명하고 공정하게 분배하고 있는가. 차트가 보여주는 현실은 명확하다. 세계는 점점 더 열리고 있지만, 그 혜택은 이미 부유한 나라의 국민들에게만 돌아간다.


2006년 전 세계 평균 비자면제 국가는 58개였다. 2025년에는 109개로 거의 두 배가 됐다. 하지만 격차도 함께 벌어졌다. 상위권 국가들은 190개 이상으로 치솟았고, 하위권 국가들은 여전히 30개 미만에 머물러 있다.


여권 계급구조는 경제 계급구조를 반영하고, 강화하고, 영구화한다. 태어난 곳이 곧 자유의 크기가 되는 세상. 이동의 자유가 부자들만의 특권으로 남는 한, 진정한 글로벌 기회는 환상에 불과하다.


한줄평

당신이 어디 갈 수 있는지는 당신이 누구냐가 아니라, 어디서 태어났냐가 결정한다. 공평한 세상은 여권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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