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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범김회장 Oct 05. 2020

너를 포기하지 않았던 시간

김회장의 인생쌓기

방광염으로 산부인과 진료차 방문했는데,

원내 광고 중 니프티 검사가 눈에 들어왔다.

내 기억은 약 4년 전으로 거슬러~

우리 어여쁜 둘째 미니미를 가졌을 때의 기억으로 갔다.


첫째 돌이 갓 될 무렵

딸을 낳아 키우고 있는 친구가 우리집에 놀러오는 꿈을 꾸었던 같은 날,

지인이 찾아와

나더러 눈이 예쁜 딸을 낳아 품에 안고 있더라며 꿈 꾼 얘기를 해주었다.

나는 개꿈이라며~ 무시했고

며칠을 보낸 뒤

설마 하는 맘에 임테기를 하고 둘째가 예고 없이 생긴 것을 알게되었다.

나와 남편은 24시간을 서로 멍하니 말도 하지 않고 임신 테스트기가 불량인 것 같다며 인정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새것을 사와 다시 테스트를 하고 더더 진해진 두 줄을 눈을 여러 번 닦고 본 기억이 난다.

축복받아야 할 상황에 남편이 했던 말은

"첫째가 어렵게 생겨서 당신임신이 잘 안 되는 몸이라고 생각했어."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걸 보니 내 맘에 상처를 받았나 보다.


우리 형편에, 지금 환경에 아기가 둘이라니!! 게다가 첫 애와 터울이 너무 짧다며,

머릿속에서는 온갖 걱정 투성을 간직한채

그래도 해봤다고 두 번째 임신이니 느긋한 맘으로 병원도 잘 안 다니며

고된 입덧이 끝날 때 까지

기형아 검사 1차만 받고 2차는 받지도 않고 게다가 1차 검사 결과는 무시한 채 임신 주수를 보내고 있었다.


분만 병원과 조리원이 동시에 있는 곳으로 병원을 옮기려고

임신 초기 다녔던 병원에서 기록지를 떼려 내원하니

의사가 펄쩍 뛰면서

"1차 검사 결과 알고도 지금 왔어요?"

"네?"

"다운증후군 확률이 이 수치면 높게 나왔는데, 어허..."

당시 나는 21주 차였다.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고, 병원에 함께 들어오지도 않던 남편은 내가 한참 동안 병원에서 나오지 않자

전화를 울려댔다. 받을 수 없었다. 손과 발이 덜덜 떨리고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2차 검사는 할 수 있는 시기가 훨씬 지났고,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검사는 양수검사랑 NIPT 피 뽑아서 하는 검사밖에 없는데, 내가 깎아줄게 70만 원에!"


일단 큰 병원으로 가봐야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동네 산부인과에서 나오는 내 모습을 남편이 발견하고 심상치 않음을 감지.

첫애는 고모에게 맡기고 곧바로 조금 큰 병원으로 갔다.

병원으로 가면서 검색을 해보았다.

1차 기형아검사지와 2차 기형아검사지를 대조하는데 나는 2차검사를 하지 않아서

1차 검사지만 가지고 확률을 따졌으므로 더 높게 측정된 것!

분만을 예정한 병원에서도 2차검사를 하지 않은 나를 이상하게 여기며

당시 주수에서 할 수 있는 검사는 'NIPT' 검사와 '양수'검사라고 했고,

아닐거라는 확신과, 혹 기형아라고 해도 내 몫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다짐을 잠시 했으므로

나는 금액을 떠나 검사를 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때 의사가

"여기는 낙태 안 되는 곳입니다. 검사받지 않으면 저는 분만을 받지 않겠어요"

라며 으름장을 놓았고

나는 다른 방법은 없냐며, 어떻게 해야 하냐 반문하니

"정밀 초음파 검사를 하고 오세요, 소견서를 써줄게요"

(정밀초음파비용은 15만원이었다)



이튿날 정밀초음파 전문 병원으로 찾아가 정밀하게 초음파를 했다.

동네 산부인과에서 받았던 1차검사결과는 확률이 25% 였는데, 정밀초음파 검사 결과는

 '다운증후군 확률 2% 미만' 의 소견서를 써주셨다.

기뻐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태어날 때까지 모르니 남은 주수를 노심초사하며 보내야 하는 것인가.

분만했던 의사는 "확률이 낮으니 괜찮다!!" 하며

제왕절개 날짜 전까지 친절하게 상세하게 세심하게 진료를 봐주었다.


뱃속에 품고 있는 남은 날 동안 나는 날마다 기도했다. 눈물도 났다.

'아니면 좋겠지만 장애라고 해도 없앨 수 없는 소중한 생명, 당신이 책임져 주세요.'


막달 검사 때 태아의 뇌간이 1cm가 넘으면 좋은 예후가 없다며 다행히 1cm 넘기지 않는 상태이니

분만 전까지 힘내라며 다독여 주는 의사에게 고마웠다.


우리 예쁜 둘째는 딸이고 다운증후군도 아니었다.


아이가 정상으로 태어나고 나니 결혼을 하지 않은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태어나게 해서 아이고생, 엄마 고생시킬 바에 차라리 지웠으면 했는데,

이렇게 예쁜 애기가 태어났네?"

어쩌면, 저런 소릴 할 수 있었을까, 물론, 나를 걱정해주는 마음에서 나온 말일테지.

지금와서 생각해 보니

비싼 비용이 드는 검사를 하도록 유도한 건 아닌지, 일부러 검사조작을 했던 건 아닌지 의구심도 들었다.

차라리 검사장비가 발달하지 않았다면 모르고 그냥 지나칠 해프닝을

'아는게 병' 이었다.


출산 후 남편도 나도 가족들도 안도했지만, 내 맘 한편에 쓰디쓴 포도주 한잔 마신 듯 개운 하지 않았다.

장애아이를 키우며 고군분투하는 이 땅의 엄마들이 생각났고,

내 일이 아니라고 넘길 수 있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응원해주고 싶고 함께 아파할 수없음에 미안하기도 했다.

주변에서 발달장애아이를 볼 때면

태아의 상태를 알고도 놓지 못한 엄마의 무한사랑과 괴로움을 아주조금은 맛봐서 너무나 가슴시림을 느낀다.   


첫째와 다르게 둘째는 어느 곳에서든 초롱한 눈빛과 당참을 가지고 있고

뱃속에 있는 동안 나의 감정을 모두 알고 있었는 듯, 태어나자마자 사랑과 관심을 갈구해댔다.

지금도 내 옆에서 쫑알쫑알 대는 내 딸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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