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디르프의 편지 #9
너희들은 신을 믿지 않는다면서도 “신은-” 으로 시작되는 출처불명의 격언들에는 감명을 받는 것 같더군.
신은 겁쟁이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하는 이들에게는 꼭 질문을 던져보고 싶군.
당신이 말하는 신은 어떤 신인가?
싯타르타는 신에 대한 답변을 회피했으니 엄밀히 말히면 원시불교에는 부재한 신의 이야기는 아닐테고.
힌두교에는 워낙 많은 “신”적 존재들이 있으니 뭐 그들 중 하나 정도는 겁쟁이를 위한 신도 있지 않을까 싶지 않나?
하지만 만약 너희 중 누군가가 이 세상을 시작한 최초의 존재, 그 정원의 주인을 유일한 신으로 섬기고 있다면 좀 다른 생각을 갖는 것이 낫지 않을까?
너희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그 책 속의 이야기를 보자고. 정원의 주인이 준 한 가지 규율을 어겨 정원에서 쫓겨난 최초의 두 사람은 즉시 처형되지 않고 후손을 낳지. 그리고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지.
조금 더 시간이 흘러 정원의 주인이 어떤 인간들을 사용했는지 살펴보자고.
백세가 넘어서야 늦둥이를 본 유명한 난임부부가 있었지. 그리고 그 백년의 세월 속 남편이 아내를 용감하게 지켜내기는 커녕 누이라고 속이고 왕에게 넘기는 일이 있었지.
또 세월이 지나 사냥꾼 장남이 아닌 얍삽한 집돌이 “마마보이” 차남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지 않는가?
엄마의 권유에 따라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복을 훔치고 도망가지. 그리고 친척에게 속아 아내로 삼고 싶었던 여자의 언니와 결혼하고 나서 또 7년이 지나서야 눈에 들었던 동생과 결혼하지.
자신을 속인 친척을 용맹하게 처단하는 이야기는 없지. 또 그 집안의 눈치 없는 나르시스트 꿈쟁이도 그렇고.
자기 민족를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입양된 왕자 출신 히브리인도 몇 번이나 겁쟁이 모습을 보였지.
정원의 주인은 사람의 용기를 보고 선택하지 않는다. 주로 그 시대의 풍습으로 볼 때 약자를 선택하는 듯 하지.
장남 대신 차남을, 미녀인 동생 대신 언니를. 다수의 부족 대신 소수의 부족을.
수천년의 시간이 흘러 정원 주인의 아들이 이 땅을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이지. 임무 수행 중 최후의 순간에 약한 모습을 보이지.
그 아들의 제자들도 그래. 정원 주인의 아들이 붙잡히자 모두 도망갔지.
그렇다면 그 겁쟁이 제자들을 정원의 주인이 사용하지 않았을까? 아니지.
그들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전하며 여러 곳으로 향히지.
신은 겁쟁이도 사용한다. 너희들이 어떤 신을 신으로 섬기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아니, 저런 말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어떤 신을 섬기는지 물어보면 답이 나오지. 대부분 그들은 신이 있는 지에도 관심이 없으면서 그저 신이라는 단어를 빌려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한 것일 뿐.
물론, 신이 사용한 후에는 그 어떤 겁쟁이라도 용기있는 자로 다시 태어나지. 이 세상의 주인이 누군지, 또 그 주인의 편에 선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건 자신이 우월함이나 교만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함 가운데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 같은 것과 비슷하지.
용기 있는 인간을 골라서 사용한다는 건 우리가 지어낸 거짓이다. 용기 있는 인간을 선택하는 신과, 겁쟁이도 사용할 수 있는 신. 어느 쪽이 더 힘이 있어 보이는 지 궁금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