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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아니면 도.

by 바다숲

한계까지 가봐야 한계를 알 수 있다. 일도 운동도 등산도 다 마찬가지다. 어제는 한계를 가늠하는 날이었다.


인간적으로 핑계를 좀 대자면, 전날 잠을 늦게 잤고 (나는 솔로 보느라) 새벽 5시에 일어나 차를 탔다. 다음 차가 오후 3시였나 6시였나. 그럼 그날은 잠만 자면 땡 치는 거라서 어쩔 수 없이 서둘렀다. 21세기에 이렇게 노선이 적다니. 더군다나 속초 설악산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관광지 아닌가. 아무튼 속으로 하소연을 늘어지게 하며 일찍 나섰다. 나이가 드니 버스에서는 불편해서 잠이 잘 안 온다. 3시간 반을 달려 속초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에서 다시 설악산 입구까지 7번이나 7- 1번을 타야 하는데 배차간격이 빠듯해서 빵 하고 우유를 사서 버스에서 허겁지겁 먹었다. 그 빵과 우유가 나의 유일하고도 마지막 에너지원이 될 줄 그때는 몰랐다. 가는 길에 숙소에 들러서 짐을 맡겼다. 전부 맡겨버린 게 패착이었다. 달랑 핸드폰과 물병 하나를 들고 출발했다. 땡볕도 힘들었지만 여름산의 최대복병은 초파린가 뭐 날파린지 모기인지가 내 몸 주위를 돌며 귀에 피가 나도록 웽웽거리는 것이었다.


숙소에서부터 설악산국립공원 입구까지 3킬로 정도를 걸어갔다.


사실 입구즈음에서 돌아올 생각으로 간 거였다. 가방도 두고 옷차림도 간편하고 핸드폰을 넣을 주머니도 얕아 손에 들어야 해서 불편했다. 그런데 막상 입구에서 산을 보고 북적대는 사람들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초입의 카페에서 벌꿀 홍삼 카페라떼를 한 잔 들이켜자 도파민이 흘러넘쳐 흔들바위까지만 가 볼까 하고 생각이 바뀌었다.



흔들바위에 도착하니 어? 생각보다 별거 아니네. 1km만 더 가면 울산바위라는 이정표를 보고 기어이 아주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다. 이놈의 생각은 왜케 슥삭 바뀌는지. 산에서 1킬로는 평지에서의 열 배 체감임을 잠시 망각했다. 사실 이미 당 떨어지는 강한 느낌에 사로잡혔고 물병의 물은 3분의 1도 안 됐다. 종일 먹은 거라곤 빵하나 우유하나가 다였다. 더군다나 거기서부터는 평지는 아예 없고 깎아지른 계단, 바위 또 계단, 바위만 반복되는 지옥의 코스였다. 그 높은 곳에 계단과 바위를 설치한 그 언젠가 계셨던 등산로 공사현장의 레전드 분들께 깊은 경의와 노고를 표한다. 아찔한 높이에 옆의 난간을 잡고 걸어도 다리가 달달 떨렸다. 그래도 이정표에 600m, 400 m 남았다는 문구를 보며 용기를 북돋아보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계속 나를 다그쳤다 그래. 너는 항상 그래 왔지, 코앞에서 포기했지? 이번엔 절대 포기하지 마. 할 수 있어. 계속 다그치다가 갤럭시 워치 심박수가 165를 넘고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눈 앞에 까매지는 어지럼증을 느끼며 결국 주저앉았다. 다시 일어서지 않으면 퍼질 걸 알면서도 그냥 앉아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난 왜 인생을 항상 '도 아니면 모'라고 생각하고 살까? 이것은 절대로 포기를 위한 변명이 아니다. 나는 언제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면' 망했다. 실패했다. 포기했다'고 생각하며 한심해하고 우울해하면서 점점 작아졌다. 목적지 근처까지 간 내 땀과 노력들은 쳐주지도 않은 것이다.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파랑새는 목적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로 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오늘, 내 옆에서 날개를 활짝 편 파랑새와 함께 한 발 한 발 최선을 다해 걸었다. 까마득히 멀던 울산 바위가 바로 코 앞에 있지만 욕심부리지 않고 여기서 오늘의 여정을 마치기로 했다.


어떻게 첫도전에 성공을 하냐. 도전 이후 성공할 수도 있고 못할수도 있지만, 확실한건 도전이 곧 성공이라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흑백 논리, '모 아니면 도'로 삶을 바라보고 평가하지 않겠다. 인생은 모도, 도도 있고 개, 걸, 윷도 있다. 20대에 임용고시에 실패한 후 늘 열심히 살아도 아무런 성과가 없다며 지금껏 청춘을 낭비했네, 아깝네....푸념하고 괴로워했다. 무려 6년을 쏟아부은 내 시간과 피땀을 증발시킨 건 나였다.


성공과 실패로 가르기엔 삶의 장면 하나하나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다. 실패가 더 좋은 삶으로 이끌때도 있다. 애는 쓰되 무리하지 않던 미생의 장그래처럼. 아... 그래도 초콜릿 하나만 챙겨 왔어도 정상까지 갈 수 있었는데, 아쉬움은 남지만 어쩔 수 없지. 아쉬움이 있어야 또 오지.

나는 그렇게 살아가기로 했다. 한 번에 한계를 넘으려 하지 않고 기억에 남는 추억들을 만들며 오래 걸려 차곡차곡 가동범위를 넓히고 다져가겠다


파랑새는 여정에 있는 것이었다. 나는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지키는 것보다 파괴하는 것을 더 잘하지만 당기고 욱씬대는 종아리가 오늘치 최선을 다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울산바위에 오른 것만큼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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