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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이 되자 동기들과 선배들 사이에서 해외로 여행이나 어학연수를 떠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만 건축을 공부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리라는 생각에 해외로 유학을 가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기는 했지만, 학교를 다니는 중에 어학연수를 따로 생각해 본 적은 없어서 왠지 그들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은 무조건 대학만 가면 뭐든지 다 잘 풀릴 거라는 듯이 얘기하곤 했다. 인 서울을 목표로 하고 지금 하고 싶은 거는 일단 좀 참으면서 목록으로 만들어 놓았다가 대학생 된 후에 다 하라고, 그때 해도 늦지 않다고 말하곤 했다. 선생님 세대와 우리 세대가 다른 건지 선생님들이 대학에 보내려고 거짓을 말한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대학에 왔는데도 여전히 하고 싶은 걸 다 하며 살 수는 없었다. 사실 미미는 하고 싶은 게 그리 많지 않았다. 관심거리가 적었고 어떻게 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조용히 살아갈 수 있을지 자주 고민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다는 현실에 어쩔 수 없이 움직였다. 살, 여행, 소개팅처럼 아주 기본적인 거에도 미미는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미미는 몇 안 되는 여자 동기들이나 여자 선배들이 편하지 않았다. 여자 선배들은 관심이 없는 듯 행동했지만 선배가 늘 끼고 다니는 미미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선배도 선배의 여자 친구도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기에 미미는 오히려 선배와 함께 하는 시간이 편했고, 학과에서는 점점 더 소외되어 갔다. 이런 소외를 오히려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약간의 고독감과 조금의 외로움이 성인이 된 미미를 반겨주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졸업하는 것과 지방에 있는 대학을 졸업한 게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을지 미미는 체감하지 못했다.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장학금을 받고 공모전에서 상을 타고 인정을 받으면 학교는 어디에서 졸업하든 상관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건축이니까, 설계와 디자인 분야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대학을 주저 없이 선태한 이유도 있다. 누군가에게 대학을 얘기할 때도 당당하게 건축을 하고 싶어서 장학금을 받고 지방대에 왔노라고 얘기를 하기는 했지만 스스로 만들어 낸 지방대라는 타이틀은 사람을 왠지 움츠러들게 하는 무언가를 포함하고 있었다.
미미는 조교 업무를 보며 많은 얘기를 들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귀에 들어오는 얘기들이 있었다. 말수가 적은 편이어서인지 사람들은 미미가 그곳에 있다고 잘 인식하지 않았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는 다니지 않아서 그 차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지방대에 다니니까 취업을 위해서는 더 많은 스펙을 쌓아야 하고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아니, 이런 학생들이 삼분의 일 정도라면 또 다른 삼분의 일은 학과 공부에 집중하기보다는 다른 쪽에 눈을 돌리고 있었고 나머지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제 1학년인데 벌써부터 자격증 취득에 목을 매는 학생들도 있었고, 자격증은 필수라고 선배들이 거듭 당부해도 흘려듣는 후배들도 있었다. 물론 미미네 학과 동기들이나 선배들 얘기는 아니다. 건축과에서는 수업과 과제로 버티기에도 하루가 꽉 차고도 시간이 부족했다. 밤샘 작업이 시시때때로 일어났는데 밥은 먹어야겠고 술도 마셔야겠으니 적당한 술을 곁들인 밥을 빠르게 먹고 약간 알딸딸한 정신으로 선 긋기에 집중하는 날도 종종 있었다. 맨 정신보다는 알코올이 조금 들어가야 선이 더 잘 그어진다는 농담이 돌 정도였다. 그래도 모형을 만들고 칼을 손에 잡을 때는 바짝 정신을 차리고 집중하는 선배들을 보면 꾀죄죄한 모습은 둘째치고 멋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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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군대 입대 전후로, 여자들은 전공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3학년이 되기 전 1학년과 2학년 여름방학에 주로, 해외여행을 떠났다. 유럽 배낭여행이 유행이었고 꼭 해외가 아니더라도 대학생이라면 한 번쯤은 배낭여행을 해야지 삶과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고 성숙한다는 그런 믿음이 사회에 만연히 퍼져 있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학과 공부와 병행하려면 돈을 모으는 건 쉽지 않았고 말이 배낭여행이지 여자로서 아무것도 없이 배낭만 지고 여행을 떠나는 건 위험 요소가 너무 컸다. 배낭여행이더라도 돈이 든다는 말이다. 이렇게 뒤숭숭한 마음을 지니고 있던 여름방학 어느 날, 휴가를 떠난 교수님 덕분에 일주일 동안 서울 집에서 진짜 방학을 맞이하게 되었다. 갑자기 시간이 남자 무얼 해야 할지 몰랐던 미미는 서울에 왔다며 놀자고 오랜만에 순이에게 연락을 했다.
“야, 뭐가 그리 바쁘다고 한 번을 안 오냐.”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화장까지 가볍게 하고 순정 만화의 여대생 모습으로 나타난 순이는 서운한 티를 팍팍 내면서도 입가는 실룩실룩 미소를 짓고 있다. 미미는 청바지에 티만 달랑 입고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나갔다. 오랜만이지만 편안한 사이니까 덥기도 하고 적당하다고 생각한 모습이었다. 갑자기 거리감이 느껴졌는데 순이의 입가를 보며 여전하군,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기분이 좋으면 순이는 어린애처럼 입가를 실룩인다.
학기 중에는 서울에 온 적이 거의 없다. 과제가 많아서 주말도 과제를 해야 한다는 핑계가 있기도 했고 실제로 주말에도 교수님이나 석박사 과정의 선배들이 일을 시키는 경우가 자주 있어 바쁘기도 했다. 건축과 조교가 아니어서 미미는 평일에만 일하고 주말에는 참여하지 않아도 크게 눈치가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주말에 일을 하면 따로 수당을 챙겨주고 식사도 늘 제공해 주어서 되도록 수락을 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집에 일이 있어서 다녀가더라도 순이를 만나거나 여유롭게 연락을 하지는 못했다. 순이도 대학생 생활을 즐기느라 시간이 많지 않기도 했으면서 괜히 툴툴거린다.
진하게는 아니어도 화장은 고등학생일 때도 했었다. 짧은 치마나 롱스커트도 자주 입고 다녔다. 오늘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것 같은데 몇 달 만에 만난 순이는 달라 보였다. 종알종알 말하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며 미미는 그 이유를 찾으려 애쓴다. 커피는 여전히 블랙을 즐기고,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여름이니 당연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홀짝홀짝 마시고 있다. 텀블러를 자주 가지고 다니면서도 빨대를 사용하는 모순을 가진 아이가 순이다. 뜨거운 커피면 몰라도 아이스를 마실 때는 반드시 빨대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번은 스테인리스 빨대를 구입해 텀블러와 함께 가지고 다니기도 했다. 앞니와 입술에 자꾸 부딪혀서 몇 번의 불편함을 겪은 후에는 스테인리스 빨대 입구에 실리콘 팁을 씌워서 사용하더니만 외출 시에는 불순물이 잘 붙고 보관이 용이하지 않아 언젠가부터는 집에서만 사용하고 가지고 다니지는 않고 있다. 오늘은 텀블러도 스테인리스 빨대도 모두 없다. 옷차림과 어울리게 작고 가벼운 가방을 가지고 나왔다. 팔목에는 얇은 은팔찌가 있다. 처음 보는 팔찌다. 순이는 늘 심플한 귀걸이와 몇 개의 작은 피어싱을 하고 다녔다. 가만 보니 구멍이 하나 정도 더 늘어난 것 같기도 하다. 미미와 순이는 둘 다 외향적인 성향이 아니어서 친구를 사귀는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여러 명의 무리 안에 있더라도 한두 명과 마음을 나누는 게 더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런 순이가 대학에서의 일과 학과 공부, 또 친구들을 사귄 이야기를 하고 소개팅까지 했다고 말하고 있다. 흥분되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재미있다는 말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