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하던 일상에 커다란 균열이 일어났다.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일상이 멈춰버렸다. 살면서 넘어지는 일은 흔한 일이지만, 잘 해내고 싶었던 목표의 언저리까지 갔다가 실패하고 나니 일어나는 게 쉽지 않았다. 이건 핑계일까, 허울 좋은 변명일까. 다 때려치우고 싶은 어리광일까. 안개처럼 뿌연 이 마음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다. 매일 고군분투하며 글을 쓴 지난 몇 개월이 꿈만 같다. 수십 번의 원고 수정을 끈기 있게 해낼 수 있다는 것도, 마감기간에 맞춰 완전히 새로운 원고도 몇 개나 써낼 수 있는 사람임을 처음 알았다. 내게도 초인적인 힘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간이랄까. 폭풍 같던 시간을 지나 아무것도 쓰지 않는 지금이 어색하면서도 될 대로 되라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저 창문 앞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초록을 느리게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는 요즘이다.
편집자님의 마지막 메일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보았다. 아쉽지만 출판은 어렵게 되었다고, 하지만 건필을 진심으로 응원한다는 말. 다정한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보아도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다. 지난 몇 개월이 순식간에 꿈처럼 흩어졌다. 지난한 과정이었다. 어떻게 매일 글을 쓰고 고쳤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더 이상 퇴고를 하며 진을 빼지 않아도 된다는 홀가분함도 잠시, 마음이 점점 가라앉았다. 나는 내가 괜찮은 줄 알았다. 어떤 결과든 받아들이기로 했으니 담담하게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후폭풍은 뒤늦게 밀려왔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읽고 싶은 책도, 쓰고 싶은 글도 없었다. 다 쏟아냈으니 텅 비어버린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작가가 되겠다는 마음 따위 땅 속 깊이 묻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대로 그만두고 싶지도 않았다. 어지러운 마음 사이를 오가며 두통과 몸살을 견딘 두 달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일부러 몇 가지 수업을 신청했다. 텅 빈 마음을 글쓰기가 아닌 다른 것으로 채우고 싶었다. 프랑스 자수와 펜 드로잉을 시작했다. 늘 아이를 위한 체험 프로그램 신청이 먼저였던 내가, 나를 위한 수업을 결제하는 건 색다른 기분이었다. 오래전부터 배워보고 싶었던 수업에 가는 건 즐거웠다. 세상엔 이런 재미도 있었지. 새로운 것을 배우는 건 이렇게나 설레는 일이었지. 한 달쯤 지난 뒤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나는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에는 영 소질이 없다는 것을. 이런 종류의 즐거움은 내게 큰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내가 가장 즐겁고 신나는 일은 글쓰기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제 그만 다시 글을 써야 한다는 사실도 함께.
무기력을 극복하기 위해 노트와 펜, 노트북을 들고 무작정 단골 카페로 왔다. 글을 쓰기 위해 몇 번이나 앉았던 작은 테이블에 앉았다. 몇 달 전에는 이곳에서 부푼 마음으로 글을 썼었다. 내 책은 어떤 모양이 될까. 어떤 사람들과 만나게 될까. 설레는 마음으로 무수한 꿈을 꿨던 바로 그 자리. 이곳에 다시 앉아 글을 쓰려니 수만 가지 생각이 밀려온다. 내가 정말 다시 글을 쓸 수 있을까. 결국 의미 없는 단어와 문장의 나열이 되지 않을까. 머릿속을 헤집는 불안한 생각들. 글을 쓰다 보면 아주 작은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기분이 든다. 막막하고 종종 외롭다. 열심히 글을 쓰다가도 습관처럼 글쓰기를 멀리 던져버린다. 신기하게도 그럴 때마다, 얼굴도 모르고 본 적도 없는 나를 응원하는 댓글이 달린다. 나의 글쓰기를 응원한다는 연락도 타이밍 좋게 도착한다. 그럴 때마다 왈칵 울고 싶은 마음이 든다. 아마도 나는 다시 글을 써야 할 이유를 애타고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 단순히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꿈도 있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거창한 목표가 없더라도, 누군가 내 글을 즐겁게 읽는 사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글을 써도 되지 않을까. 이젠 정말 모든 게 다 끝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다시 노트북 전원을 켠다. 아이패드 메모장을 열고 키보드를 연결한다. 낡아버린 나의 작은 수첩의 새로운 페이지를 펼친다. 끝없는 반복. 다시 애쓰는 일상으로. 읽고 쓰는 삶으로 돌아온다.
카페 구석에 앉아 양미간에 주름을 잔뜩 만들며 무언가를 쓰는 것.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이자, 제일 사랑하는 시간이다. 곧 뜨거운 여름이 올 테고, 선선한 가을이 스치듯 지나면 겨울이 오겠지. 나는 흐르는 계절과 함께 글을 쓰기로 한다. 봄과 함께 글을 시작하고, 여름처럼 뜨겁게 최선을 다해서. 가을에는 열매를 맺기 위해 원고를 모으고, 겨울엔 완성된 원고와 함께 나를 꼭 안아주는 시간을 보내려 한다. 삶과 글쓰기는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는 걸 나는 이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내게 일어난 무수한 균열, 그 과정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들을 써보려 한다. 조각난 마음을 이어 붙이며 알게 되는 새로운 마음들에 대해. 넘어져도 씩씩하게 다시 일어나는 건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고, 실패 속에서 작은 희망을 발견하는 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발견한 기쁨들을 글로 남기는 것이야말로 균열을 단단하게 메우는 일이 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