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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작은 수첩

한여름의 도미노

by 현수진



오늘은 정말 혼이 쏙 빠지도록 더웠다. 모자에 양산까지 썼지만, 뜨거운 햇빛은 기어코 내 몸 어딘가를 찾아내 빨갛게 달궜다. 휴대용 선풍기는 의미 없는 더운 바람만 내뿜은 지 오래다. 오늘이 우리에게 가장 시원한 날이라는 과학자들의 말을 실감하고 있다. 얼마나 더 무시무시한 여름이 온다는 걸까 한숨을 내쉬며 도서관으로 향했다. 여름엔 도서관이 제일이다. 시원하고, 책이 가득하고, 무엇보다 혼자서 조용히 숨을 고를 수 있는 곳. 하지만 기대와 달리 오늘 이곳의 공기는 미지근하다. 적정 온도 유지를 위해서일까. 아니면 나처럼 더위를 피해 달려온 사람이 많아서일까. 시원하지 않은 도서관에 살짝 배신감이 들었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더위를 피하기에 이만한 곳은 없다.


도서관 책상에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쓰다 보면, 갑자기 졸음이 와르르 쏟아질 때가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긴장이 풀려서일까. 이대로 고개를 떨구고 눈을 감고 싶어진다. 귀에 들어오지 않는 수학 풀이를 자장가 삼아 꾸벅꾸벅 졸던 때가 떠오른다. 필사적으로 졸음을 참아봐도 정신없이 좌우로 머리를 흔들던 어린 날의 나. 그때 나는 어떻게 졸음을 버텼더라. 교과서를 방패 삼아 얼굴을 파묻거나, 같은 무늬를 반복해서 그리는 낙서에 의지했던 것 같다. 의미 없는 쪽지를 친구와 주고받으며 지루함을 버티다가 혼이 나기도 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키보드를 치다가 화들짝 놀랐다. 그새 깜빡 존 것이다. 눈앞에 익숙한 서가가 보이고, 나는 교복을 입지 않았다. 모니터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글자가 아무렇게나 나열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도서관에서 엎드려 자고 싶지는 않다. 내게 도서관은 일종의 작업실 같은 곳이다. 최대한 집중해서 오늘의 글을 쓰고 싶다. 잠깐 일어나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며 잠을 쫓아본다. 서가를 어슬렁 거리며 어깨를 돌리거나 찌뿌둥한 몸을 움직인다. 아예 밖으로 나가 시원한 물을 마시거나 창문 너머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기분을 바꿔본다. 다시 자리에 앉자마자, 갑자기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남학생 무리가 들어온다. 손부채를 하며 인상을 잔뜩 찌푸린 그들은 책상 위로 짜증스럽게 쾅 가방을 내려놓고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엎드린다. 이곳에 온 목적은 바로 이거라는 듯. 셋이서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 당당하게. 평소 같으면 일자로 눈을 흘기며 쯧쯧 혀를 찼을 것이다. '도서관은 자러 오는 곳이 아니야'하고 화를 삼키며. 하지만 오늘은 할 말이 없다. 졸음이 쏟아지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되려 눈치 보지 않고 곧바로 잠든 그들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날이 더우니 다들 진이 빠진 게 분명하다. 맞은편에 앉아 열심히 무언가를 읽고 적던 할아버지도 결국 스르르 엎드려 단잠을 청한다. 마치 길게 늘어선 도미노가 자기 차례가 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넘어지는 것처럼. 남색의 교복 무리 옆으로 체크무늬 할아버지가 잠들고, 검은색 모자를 쓴 나는 졸음에 맞서 고군분투 중이다. 이대로 나까지 엎드려 잔다면 이 테이블은 완전히 전멸이다. 누군가 도서관에 들어왔는데, 죄다 엎드려 자는 모습을 보고 흠칫 놀라는 표정을 상상해 본다. 역시 도미노의 일원이 되고 싶지는 않다. 휴대용 선풍기를 얼굴 쪽으로 돌려 급히 졸음을 쫓는다. 멀리 날아가길 바라며 강풍으로 버튼을 돌린다. 글쓰기를 멈추고, 읽던 책의 페이지를 힘겹게 넘긴다.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무더위가 기승인 한낮의 졸음에는 남녀노소가 없다. 졸음의 이유도, 무게도 각자 다를 것이다. 오르락내리락 천천히 움직이는 그들의 등을 슬며시 바라본다. 그래도 잠시 눈을 붙이고 나면 조금은 개운할까. 고단함이 눈 녹듯 사라질까.


여름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폭염이 이어질수록 도서관의 졸음행렬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한여름의 도미노가 곳곳에서 발견되더라도 더 이상 눈을 흘기지 않을 것이다. 한낮의 쪽잠이 누군가에게는 무더운 여름을 버티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 몸을 둥글게 말아 책상 위로 고개를 파묻고, 눈과 귀를 닫은 채 완전히 깜깜해지는 것. 그렇게 우리는 각자 길고 긴 여름을 버틸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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