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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기회일지도 몰라

by 현수진


도서관 자동문이 열리지 않는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옆문을 열었지만 묵묵부답이다. ‘뭐지?’하고 생각하는 순간, 문에 걸린 흰색 팻말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은 휴관일입니다’. 양어깨 가득 반납할 책을 들고 여기까지 왔건만, 어둠이 내려앉은 도서관은 조용하다. 순식간에 등줄기에 땀이 흐르고 얼굴에 확 열이 오른다. 이런 멍청이. 휴관인 줄도 모르고 무작정 온 거야? 그렇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연체되었다는 문자를 보고 허겁지겁 책을 싸 들고 타이밍 좋게 도착한 버스에 올라타 이곳에 온 것이다. 다행히 무인반납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화면에 찍힌 책과 실제 책을 비교해 가며 신중하게 반납을 완료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나는 도서관 서가를 신나게 누비고 있어야 했다. 읽고 싶은 책이 있었고, 아이가 부탁한 책도 찾아야 했다. 오전 계획은 말짱 꽝이다. 책을 반납하고 나니 갑자기 허무해졌다. 이제 뭘 해야 하지. 시간이 너무 많이 생겨버린 기분이다. 일단 커피라도 마셔야겠다 싶어 근처 카페에 들어왔더니 이른 아침인데도 사람이 가득하다. 도서관에 가지 못한 사람들이 이곳에 불시착한 게 아닐까. 노트북에 시선이 고정된 사람, 책 읽는 사람, 문제집에 얼굴을 묻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가방 속에서 아이패드와 키보드를 꺼내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차라리 책을 빌리지 못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나는 글쓰기 전에 자꾸만 책을 먼저 읽는다. 읽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 있고, 글 쓸 의욕은 사라진 지 오래다. 책만 홀랑 읽고 한 글자도 쓰지 않는 날이 늘어가던 참이었다. 오늘은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글을 쓰자. 휴관일은 내게 주어진 일종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엊그제 샤워하고 나온 딸의 머리를 말리는데, 아이가 불쑥 내게 물었다. “엄마, 요즘 글 쓰고 있어?” 훅 들어온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응, 써야지.”하고 대답하며 한층 더 부지런히 머리의 물기를 털어냈다. ‘응’은 긍정의 말이고, ‘써야지’는 부정의 말이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뒤돌아보는 아이에게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드라이어 세기를 최대로 올리자 위이이잉 소리가 아이와 내 사이를 가로막는다. 얼렁뚱땅 위기를 넘겼지만 어쩐지 씁쓸하다.

출간에 실패한 뒤 나의 글쓰기는 그대로 멈춰버렸다. 지인 몇몇이 이따금 물었다. 요즘 글쓰기는 잘돼 가? 그때마다 나는 덤덤하게 그렇다고 말한다. 정말이다. 분명 쓰고 있는데 완성된 글이 없을 뿐. 멈춰버린 수많은 글이 컴퓨터에, 아이패드에, 수첩에 잠들어 있다. 그런 글들은 때때로 처리하기 힘든 잡동사니 같다. 폐기물 스티커를 붙여서 버려야 하는데 자꾸 망설이게 되는 물건 같은 글. 단호하게 삭제 버튼을 눌러 휴지통에 버리면 되는데 기어코 노란색 새 폴더를 만든다. ‘수정 중’‘쓰다 멈춘 글’ 같은 이름을 붙여 오갈 데 없는 글을 모두 담아 둔다. 매정하게 버리기엔 들인 시간이 아깝고, 쓰다 만 글을 짜깁기하듯 이어 붙일 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완성된 글은 하나도 없는 현실에 직면한다. 글을 쓰고 있다고 하기엔 양심이 없고, 안 쓰고 있다고 하기엔 억울한 것이다.


그럴 때마다 책으로 도망쳤다. 책은 그나마 낫다. 대부분 휴대전화 알고리즘에 뇌를 맡긴 채 무의미한 시간을 보낸다. 때마침 열리는 축구나 야구 경기 속으로 부지런히 달려간다. 최대한 글쓰기로부터 멀리, 있는 힘껏 도망친다. 생각해 보면 나는 늘 이런 식이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도망칠 때마다 절감한다. 글로부터 도망치는 것이야말로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인 것 같다.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무기력해지고, 절대 뒤돌아보지 않을 것처럼 굴다가도 다시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사람. 글쓰기를 놓지 못하는 미련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어차피 돌아올 걸 알고 있어서일까. 요즘은 도망치면서도 어떤 글을 쓸지 고민한다. 머릿속에 이런저런 문장을 써둔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와 하얀 화면 위로 모아둔 문장을 쏟아낸다. 쓸만한 문장은 몇 되지 않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며 흡족해한다. 밥 먹는 것도 잊고, 해야 할 일도 미룬 채 신나게 글을 쓴다. 이런 글을 누가 읽어줄까 싶지만 그래도 역시 글 쓰는 게 제일 재밌다. 글쓰기 앞에서는 정말 어쩔 수가 없다.


실은 그만두고 싶었다. 이번에야말로 글쓰기와 담백한 이별을 하고 싶었다. 슬그머니 이대로 멀어지려던 즈음, 눈치 빠른 남편이 왜 요즘 글을 하나도 쓰지 않느냐고 물었다. 대답 대신 ‘나 앞으로 글 안 써도 되지?’하고 되물었다. ‘나 작가 못 돼도 괜찮지? 다들 꿈을 이루고 사는 건 아니잖아.’ 남편은 그래도 조금씩이라도 쓰라며 내 어깨를 토닥였지만, 사실 모든 건 나를 향한 질문이었다. 정말 이대로 포기해도 괜찮냐고, 평생 남들이 쓴 글만 읽으며 살 수 있냐고. 쓰지 못하는 괴로움을 견딜 수 있는지 말이다. 대답은 ‘NO’였다. 나는 괜찮지 않았고, 견딜 수 없었고, 앞으로도 글쓰기로 몇 번이고 돌아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내게 글쓰기는 마치 짝사랑 같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나만의 짝사랑. 도저히 그만둘 수 없는 애틋한 짝사랑. 언젠가 날 버린 사랑 앞에서 구차해진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집 앞에 찾아가고, 눈물로 호소한 적도 있었다. 짝사랑이라고 해도 글쓰기에 매달리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이대로 나는 이 짝사랑을 이어가면 된다. 더 구질구질하고 미련해지더라도.


어쩌면 알 수 없는 어떤 존재가 나를 글쓰기로 밀어 넣고 있는 게 아닐까. 오늘 도서관이 휴관인 것도, 때마침 들어간 카페에 글을 쓰고 책 읽는 사람이 많았던 것도. 숨기 편한 그 풍경으로 들어가 미뤄둔 문장을 꺼낸다.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또 쓸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다. 분명한 건, 나는 이 하얀 화면 앞에 앉아있는 시간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몇 번이고 이곳으로 돌아와 아주 조금씩 나아간다는 것이다. 자신을 어르고 달래 가며, 엉뚱한 날 도서관에 온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루지 못한 꿈이 다시 나를 일으켜 세운다. 더 이상 폴더 안에 글을 가두지 않고 부지런히 밖으로 꺼낼 생각이다. 그 작은 전진을 위해, 나아가는 마음을 지키고 싶어 오늘의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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