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 집의 슈퍼스타였다. 우리 할머니는 딸을 무려 여섯을 낳았는데 둘은 전쟁통에 죽었고 마흔 넘어 겨우 얻은 아들이 우리 아빠였다. 그 금쪽같은 아들이 낳은 첫 자식이 마침 또 아들이다 보니 할머니에게 나는 말 그대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장손이었다. 할머니에겐 이미 수많은 손주들이 있었지만 틈만 나면 내게
"우리 이언이가 세상에서 지일이지~(제일이지)"
라고 말해줬을 만큼 나를 끔찍하게 귀애했다. 아직도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할머니가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 할머니 눈 속에는 세상을 다 가진 자 같은 눈부신 행복이 넘실댔다.
아빠와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고모 네 명에게도 나는 활력소 그 자체였는데 그들에게 내가 어찌나 귀했는지 고모들은 나를 늘 '도련님~'이라고 부르며 각자 쇤네를 자처했다. 친가 사촌들 마저도 나와 최소 10살 이상 차이가 나다 보니 내가 그들의 집에 놀러 가서 방을 어질러 골탕을 먹이건 누나 소리 하지 않고 이름 뒤에 똥을 붙여 놀려먹건 아무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나의 우주는 엄마, 아빠 할머니가 같이 사는 우리 집뿐이었고 나의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오로지 나의 원가족과 고모네 식구들 뿐이었다. 이 시절 나의 우주는 너무나 행복하고 평화로워서 대문 밖의 세상은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내가 세상을 엿보는 매체는 TV와 책, 그리고 가족들과 나누는 대화가 주였다. 문 밖의 세상은 그저 정글처럼 험하고 낯설게 느껴졌고 친가 식구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그게 혈연관계이건 남이건 모두 만나자마자 엄마 등뒤에 숨고 싶은 존재들이었다.
할머니와 함께 살다 보니 그 당시에는 외가 식구들과 교류가 거의 없었는데 어쩌다 외갓집 식구들을 만나게 되면 나는 외갓집 사촌들과 전혀 어울리지 못하고 냅다 엄마에게 달려가 빨리 집에 가자고 성화를 했다. 무결점의 행복을 누리던 그 시절을 되짚어보면 그때 나의 가장 큰 공포는 길을 잃고 미아가 되는 것이었다. 가족들 모두 나를 알뜰살뜰 살폈으니 미아가 될 일도 딱히 없었지만 그 막연한 공포가 늘 나의 외출을 긴장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내가 세네 살 때쯤 엄마랑 아빠가 잠깐 서초동에서 카페를 했는데 이때 엄마와 처음 떨어지게 된 것은 내 인생 최초의 시련이었다. 고모들이 할머니와 엄마 사이를 분탕질해서 할머니는 갑자기 나를 봐주지 않겠다고 했고 결국 나는 어린이집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어린이집이 내게는 감옥과 같았다. 매일 어린이집을 가지 않겠다고 목구녕이 찢어져라 울었던 것은 기본이고 어린이집에 애써 데려다 놓아도 그저 울기만 했다. 어린이집 선생님도 친구들도 궁금하지 않았고 그저 집에 가고 싶어 목 놓아 울었다. 예민하기는 또 얼마나 예민한지 어린이집에서 지린내가 난다고 엄마에게 가지 않겠다고 으름장도 놓았고 거기서 주는 밥은 일절 먹지 않고 쫄쫄 굶고 집에 왔다.
맞벌이를 하려다 애를 잡게 생겼으니 결국 어린이집을 때려치우고 할머니가 나를 봐주기로 했다. 나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할머니와 있어도 엄마와 떨어지는 것이 고통스럽긴 매한가지였다. 어린것이 엄마 아빠 출근길까지 아득바득 쫓아 나가 가지 말라고 울어대기 일쑤였고, 엄마는 집 앞에 있는 태양슈퍼에서 가나 초콜릿을 하나 내게 쥐어주고 눈물을 훔치며 출근을 했다. 한 손에 초콜릿을 쥐고 아빠가 타던 엘란트라가 사라질 때까지 쫓아갔던 기억이 생생한데 누가 보면 부모에게 버림받은 애마냥 홀로 아침마다'미워도 다시 한번'한 편을 찍었다.
할머니가 아무리 맛있는 밥을 해줘도 잘 먹지 않았고 잠시 살림을 봐주던 이모님이 와도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가뜩이나 엄마가 보고 싶어 죽겠는데 낯선 아줌마까지 집에 와서 그저 심통이 났다. 결국 이모님을 내보내고 할머니가 나를 독박육아 하게 되었다. 어린 게 까다롭기는 또 얼마나 까다로운지 하루는 할머니랑 시장에 갔다가 붕어빵이 먹고 싶었는데, 붕어빵 안에 든 팥은 싫다고 난리를 쳐서 할머니가 붕어빵 장수에게 팥 없는 것을 특별히 만들어 달라 부탁해야 했다. 아직도 기억이 날 정도로 무척이나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할머니는 그 엄동설한에 나를 데리고 팥 없는 붕어빵을 하염없이 기다려줬다. 애들은 놀이터에 풀어만 놓아도 알아서 잘들 논다던데 나는 놀이터에 데려가도 놀 줄을 모르니 할머니가 나보다 나이가 더 있어 보임직한 아이들에게 미끄럼틀 좀 같이 태워주라고 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내 흥미를 잃고 할머니에게 집에 가자고 했던 그 유난스럽고 특이한 애가 바로 나였다.
그 시절 나의 온 신경은 엄마가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져 있었다. 바깥에 아빠 차가 들어오는 기척이 들리면 우다다다 3층 계단을 내려가 엄마 아빠를 맞았다. 할머니가 있어도 유독 엄마에 대한 애착이 심했고 지독한 분리불안이었다. 마침 아빠가 다른 사업을 시작하게 되면서 엄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업주부로 돌아왔고 내 삶에 다시 평화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동생이 태어날 즈음에 엄마는 나를 유치원에 보내기 시작했다. 유치원에 갈 때도 가지 않겠다고 지랄발광을 했던 것은 매한가지였다. 하루는 유치원에 안 가겠다고 난리를 치다가 아빠가 대문 밖으로 내쫓았는데 절대 안 나가겠다고 아빠에게 매달리다 아빠의 와이셔츠를 찢어놓기도 했다. 결국 대문 밖으로 쫓겨났지만 이를 보다 못한 할머니가 바로 나를 구출해 주었으니 이때의 나는 말 그대로 어떤 상황에서도 보호막이 있었던 든든한 시기였다.
유치원에 가도 흥미란 1도 없었다. 친구를 사귀는 것도 흥미가 없고 유치원에서 하는 모든 게 다 낯설고 싫었다. 길만 알면 유치원을 탈출해서 혼자 집에 가고 싶을 정도로 도망 욕구가 급했다. 애들이야 소풍이 있으면 가기 하루 전 날부터 설레서 잠을 못 잔다는데 나는 소풍이건 현장학습이건 가기 전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당시 내게 집 밖은 우리 집과 셋째 고모네 집 빼고는 다 위험한 곳인데 그나마 살짝 익숙해진 유치원이 아닌 새로운 공간에 체험하러 간다는 것 자체가 너무 싫었다. 현장학습 때 찍힌 내 사진을 보면 정말 울기 직전인데 짜증이 가득 찬 게 어린 게 얼굴에 성깔이 가득하다.
이때 내 인생에 또 한 번 위기가 왔는데 바로 유치원에서 캠프를 간 것이다. 가지 않겠다고 난리를 쳤지만 어쩔 수 없이 가게 되었고 난생처음 엄마 아빠가 없이 낯선 곳에서 밥을 먹고 잠까지 잔다는 것이 하늘이 무너질 정도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캠프 내내 울고 밥은 한 톨도 안 먹었으며 새벽에도 울다가 깼던 기억뿐이다. 집에 가고 싶어서 진이 빠지게 울고 있는데 밤 중에는 무슨 캠프파이어를 한다고 강제로 인디언 복장까지 시키고 춤까지 추라고 시켜서 그저 죄다 엎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캠프가 끝나고 집에 돌아갔을 때의 그 해방감과 반가움을 말하자면 아마 출소한 죄수의 기분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캠프파이어에 다녀온 것이 분해 나는 더욱 유치원 등교 거부를 했고 엄마는 생각보다 쉽게 나를 유치원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어차피 학교 가려면 2년 정도 남았으니 그냥 집에서 엄마랑 놀자고. 내게 강 같은 평화가 다시 찾아온 순간이었다. 집 안에서는 그저 모든 것이 따뜻했고 평온했고 재밌었다. 대문 밖의 세상은 그저 내게 위험하고 싫은 존재였다.
엄마가 나를 강제로 밖으로 돌리면서 외향성을 키우는 게 내게 더 나았을지 아니면 나의 내향성을 존중하고 가정 보육을 한 게 잘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다른 의견이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초등학교 입학 전 엄마와 집에서 지낸 시간이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한 시간 중 하나였기에 엄마의 선택이 감사할 뿐이다. 10대 때 일찍 유학을 가면서 어려서부터 부모와 일찍 떨어져 살 팔자였던 내게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보냈던 밀도 있는 그 몇 년이 내 자존감의 근간이자 엄마와의 단단한 유대관계를 만들어 주었다.
그 시절이 행복했던 이유는 나의 좁은 세상에 있는 그 누구도 나를 내향적이다 또는 외향적이다 판단하지 않았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존중받을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당시 시대상 남자새끼가 뭐 그리 내성적이고 예민하냐고 타박을 받을 수도 있을 법했는데 가족들 누구도 유난스럽고 별난 나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참 좋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나의 전성기는 만 5세를 기점으로 맥없이 막을 내렸다. 고부갈등이 극심해진 엄마와 할머니는 결국 분가를 선택하게 되었고 그때 마침 동생이 태어났다. 할머니는 시집와서부터 알뜰히 자신을 봉양해 온 엄마가 뭐가 그리 괘씸했는지 동생이 태어나도 병원에 찾아오지도 않았다.
온 가족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살다가 갑자기 동생이라는 초대형 신인이 나타났고 나의 팬층의 기반이던 할머니와는 갑자기 떨어져 살게 되었다. 할머니와 헤어지니 고모들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살면서 지나친 적도 없던 낯선 동네에 이사를 가게 되고 주택에서만 살던 내가 갑자기 아파트에 살게 되는 변화가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누구도 내게 나의 평온한 우주가 몰락하는 것에 대해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 참 알 수 없는 것은 이 아파트에서의 새로운 삶이 내향적인 나를 인생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인싸로 살게 해 준 기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3편에서 이어집니다
2025년 02월 16일 (일요일)
'내성적인 게 죄는 아니잖아' - 유이언 작
인스타그램과 스레드에서도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