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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가장 따뜻한 기억들

엄마가 남겨준 그리움의 순간들

by 김유인

​문득 돌아보면, 내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은 다름 아닌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다.
​국민학교 1학년, 유난히 추웠던 겨울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나오자 교실 앞에서 언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언니는 자기 코트를 내 코트 위에 겹쳐 입혀주고, 목도리까지 둘둘 말아주었다. 심지어 장갑도 끼지 않고 온 나에게 언니는 자신의 장갑까지 벗어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30분 남짓한 거리를 걸어 집으로 향했다.
​"언니, 안 추워?"
​걸어가다 내가 물으면, 언니는 "네가 안 추우면 언니도 안 추워"라고 답했다.
​집에 도착하자 엄마는 깜짝 놀라 우리를 맞이했다. 언니는 추위에 얼굴과 손이 파랗게 얼어 있었고, 나는 언니의 따뜻함 덕분에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으니 말이다. 그날 언니는 감기에 걸려 며칠을 앓아누웠다. 내가 "언니, 많이 아파?" 하고 물으면, 끙끙 앓으면서도 "괜찮아?"라고 되묻던 언니의 모습이 생생하다. 언니는 항상 나를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나 보다.


​내 인생 최초의 경이로운 세상, 바로 영화관에서의 기억이다. 내가 다섯 살 무렵이던 1969년,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이 한국에 개봉했다. 그때 부모님은 우리 가족 모두를 데리고 극장에 가셨다. 난생처음 가본 극장의 거대한 화면에서 사람이 움직이고 아름다운 음악과 노래가 나오는 장면은, 텔레비전조차 귀하던 시절에 굉장히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중에서도 무도회가 열리고 아이들이 긴 계단을 한 명씩 올라가며 'Good Bye'를 부르던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아마 그런 계단이 있는 집을 처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내 기억 속 최초로 온 가족이 함께한 행복한 나들이였고, 정확한 그날의 모든 순간은 흐릿하지만 단편적인 장면들이 아직도 나를 행복하게 한다. 그래서 지금도 '사운드 오브 뮤직'은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남아,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면 꼭 챙겨본다.


​또 다른 행복한 기억은 해마다 명절이 다가올 때의 풍경이다. 엄마는 명절 한참 전부터 필요한 음식 재료를 준비하셨다. 명절에 먹을 김치를 새로 담그고, 생선을 사다가 말렸다. 식혜를 만들어서 시원한 곳에 두고, 추석이면 송편 소를 준비하고, 설이면 흰 가래떡을 뽑아 오셨다. 우리는 큰집이 아니어서 제사를 지내지는 않았지만, 엄마는 언제나 우리 가족이 먹을 음식을 따로 준비하시느라 부지런히 움직이셨다. 추석이면 다 같이 둘러앉아 송편을 빚고, 설이면 만두를 빚었다. 지금 생각하면 평범한 풍경이지만, 그래서 더 가슴 시리도록 그리운 시간들이다.
​나는 명절 아침 부엌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참 좋았다. '치익' 하는 기름에 뭔가를 볶는 소리와 '똑똑' 바쁘게 도마 위 뭔가를 써는 소리. 이른 아침에 들리던 그 소리들은 어린 나에게 행복과 안정감을 주었다. 일어나면 그 전날 곱게 접어둔 명절빔을 입고 맛있는 아침을 먹고, 친척집에 갈 준비를 하곤 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명절은 더 이상 행복만 가득한 날이 아니었다. 엄마에게 차례를 올릴 때마다, 그전에 느꼈던 행복감 대신 가슴 한편에 큰 구멍이 뚫린 듯한 허전함이 밀려왔다.
​그 행복이 영원하진 못했지만, 짧고 소중했던 그 시간들이 평생 나를 지탱해 주고 웃게 만든다. 나를 지켜주고 아낌없이 사랑해 주신 언니,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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