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걱정 어린 새벽, 캐나다 스키장에서 의 재도전
나는 운동을 그다지 잘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끈기도 승부욕도 부족한 편이었다. 운동 신경이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지만, 뜨거운 햇볕 아래 운동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그늘에서 몰래 쉬곤 했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빠져든 운동이 있었으니, 바로 겨울 스포츠인 스키였다. 스키를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는 직장 선배 언니의 권유였다.
내가 난생처음 가본 스키장은 경기도 포천의 베어스타운이었다. 처음 스키장에 도착해서 산을 깎아 만든 하얀 슬로프를 봤을 때,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나의 탄성에 같이 간 선배 언니는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스키에 대해 처음부터 하나하나 가르쳐주었다.
부츠와 플레이트, 폴을 빌렸다. 빌린 부츠를 신고 플레이트는 어깨에 둘러멘 채 밖으로 나섰다. 부츠는 너무 불편해서 걷기 힘들었고, 플레이트는 또 어찌나 무겁던지 걸어오는 동안 기운이 다 빠졌다.
눈 위에서 부츠를 플레이트에 장착했다. 그리고 옆으로 걷는 연습부터 했는데, 그 무게만으로도 다리를 움직이기 어려웠다. 언니는 옆에서 차분하게 가르쳐주었지만, 나는 장비의 무게와 미끄러운 눈 위에서 마음과 달리 몸이 움직여 자꾸 넘어졌다.
그래도 어느 정도 균형이 잡히자, T-Bar를 타고 슬로프 초입까지 올라가 플레이트를 A자 모양으로 만들어서 천천히 내려오는 연습을 시켜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민망할 정도로 못했는데, 언니는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옆에서 가르쳐 주었다.
점심을 먹고 언니는 나를 데리고 리프트를 태워 올라갔다. 광고에서만 보던 리프트를 처음 타보는 흥분도 잠시, 내릴 때는 균형을 못 잡고 넘어지고 말았다.
위에서 내려다본 슬로프는 밑에서 올려다본 것보다 훨씬 가팔라서 보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래도 언니가 용기를 주면서 내려가자고 권유했다.
나는 배운 대로 A자를 만들면서 조심스럽게 내려오려 했지만, 어김없이 엉덩이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첫날이라 장비만 빌리고 스키복도 준비 못 해 청바지를 입고 탔다. 너무 많이 넘어져서 바지가 축축하게 젖었고, 게다가 하얀 슬로프가 청바지에서 빠진 물로 푸르스름해져서 너무 민망했다. 다음 해부터 나도 많은 친구나 후배들을 입문시켜 주었는데, 나만큼 못 타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런 민망한 경험이 있었지만 나는 스키의 매력에 푹 빠졌다.
집으로 돌아간 다음 스키복을 사고, 언니의 도움으로 스키 장비도 마련했다.
지금은 문을 닫아 그립고 아쉬운 진부령 알프스 스키장을 일요일마다 다녔다. 서울에서 멀었지만 설질은 최고였고, 게다가 일요일은 차비를 안 받고 운행을 했다. 용평이나 베어스타운이 화려한 스키어들이 다니는 곳이었다면, 알프스는 소박하게 스키를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스키 장비는 버스가 출발하는 종로의 오진 관광 사무실에서 맡아주어 그 당시 스키어들은 그곳에 장비를 맡기고 다녔다.
일요일 새벽 6시에 출발하는 차를 타려면 5시 30분에 집에서 나와야 했다. 아버지께서 그 새벽마다 일어나셔서 택시 타는 곳까지 데려다주셨다. "조심해라"는 당부를 하시며 얼굴에는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찬 표정으로 나를 보내주셨다.
그해 겨울은 매주 일요일이면 알프스 스키장으로 가서 지냈다. 아버지께서 걱정이 돼서 아무리 쉬라고 해도 일요일 새벽 어김없이 일어나서 스키를 타러 가곤 했다.
드디어 방향 전환도 되고 제어도 잘되어 넘어지지 않고 내려올 수 있게 되었고, 중급자 코스에 올라가서 내려오는 기분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느낌과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실수로 한번 넘어져도 혼자 하늘을 보고 깔깔거리고 웃었다. 두껍게 쌓인 눈이 그렇게 포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얀 슬로프 위에서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내 스키 뒤로 은색 눈발을 뿌리며 내려올 때, 몸은 가벼웠고 마음은 더 가벼워서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밝은 햇살이 슬로프의 눈 위로 반사되어 차갑게 부서지고, 지칠 줄 모르는 젊음도 같이 빛났다.
산 정상으로 올라가 건너편에 바라보이는 눈 덮인 봉우리, 탁 트인 시야에서 내려다보이는 마을과 계곡들, 푸르른 하늘과 차가운 북풍의 바람 소리. 햇볕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앙상한 나무에 쌓인 눈. 그것들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정들이었다.
어느 일요일에 도착하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기분 좋게 눈을 맞으며 스키를 탔다. 눈이 오니 스키가 더 잘 타지고, 기분도 더 좋았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슬로프에 사람이 빠지기 시작했고, 눈은 걷잡을 수 없이 내리기 시작했다. 정말 눈이 그렇게 많이 내린 것은 본 적이 없었다. 오전 11시가 지나자 슬로프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나 혼자 그 텅 빈 스키장에서 내리는 눈과 함께 스키를 즐기고 있었다.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아서 나도 산장으로 들어갔다. 핫초코를 마시며 걱정에 휩싸였다. 혹시라도 오후에 차가 못 떠나면 어떡하나, 남은 돈도 거의 없는데 밤에 잠은 어디서 자야 하나. 요즘처럼 인터넷 뱅킹이 되는 것도 아니고,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곳에서 말이다.
주위를 돌아보니 내 또래의 여자 두 명이 앉아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슬쩍 말을 걸어 눈이 많이 와서 걱정 안 되냐고 물어봤더니, 그중 한 분이 환하게 웃으며 "이곳은 원래 이 정도의 눈은 흔하대요."라며 안심을 시켰다. 그렇게 4시가 되고 진짜 버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출발했다. 너무 긴장했던 나는 버스에 몸을 싣자마자 곧 잠이 들었고, 30분쯤 자고 눈을 떠 봤더니 도로가 말라 있었다. 겨울이라 밖은 어두워져 있었지만 땅이 말라 있는 것을 확인하고 비로소 기쁨과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 시즌을 행복하게 보내고, 일 년 내내 직장 동료들에게 스키에 관해 얘기를 했다. 그래서 모두들 겨울을 기다렸고, 드디어 12월이 되자 내 지도 아래 같은 부서 동료 두세 명과 함께 스키를 타러 다녔다. 나는 예전에 선배 언니에게 배운 것처럼 스키 신는 법, 걷는 법, A자로 천천히 내려오는 법까지 하나씩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그 친구들도 일요일 새벽이면 나와 함께 스키장으로 향하곤 했다. 나도 동료가 생겨서 어떤 어려움도 함께 대처할 수 있어서 든든했다.
하지만 나는 예전에 느끼던 그때의 짜릿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전에만 스키를 타고, 오후엔 식당이나 오락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날들이 늘어났다. 슬슬 빠지는 날이 생기더니 다음 시즌부터는 한두 번만 타고 넘어갔다. 마침내 결국 스키 장비를 언니에게 넘기며 마음도 멀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는 캐나다로 이민을 왔다. 4월까지도 산에 눈이 남아있는 겨울 스포츠의 나라. 언젠가는 나도 다시 한번 스키를 타야지, 마음만 품은 채 눈 덮인 산들을 바라보며 지냈다.
그리고 작년 겨울, 드디어 결심하고 스키복을 사고, 중고 스키 장비를 마련해 스키장으로 향했다. 그날따라 산 정상엔 안개가 끼고, 오랜만에 신은 부츠는 왜 그리 불편하고, 플레이트는 어찌나 무겁던지... 처음 스키 타던 날이 생각났다. 결국 반나절 만에 돌아오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결심한다. 올겨울엔 다시 한번 도전해 보리라.
청바지를 벗고 스키 바지를 입고 선배 언니와 찍은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