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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비 Sep 08. 2024

4화. 사랑의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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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바닷가에서 한 이야기들이 서로에게 많은 생각을 이끌었지만 함께 누워있다는 사실에 나는 그 어떤 다른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까끌까끌한 잠옷 사이로 부드러운 Y의 살결이 느껴진다. 우리는 입을 맞춘다. 모든 것을 남겨두고 둘만의 세상으로 떠난다. 거칠어지는 숨소리 사이로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취한다.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인지 아니면 점점 사라져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조심스럽고 천천히 움직인다. 내 안에 있던 사랑의 감정이 물리적인 형태를 갖추고 그녀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Y는 내 사랑을 먹는다. 

“사랑해” Y를 꼭 껴안고 말한다.

“나도” 내 눈을 바라보며 답한다.

“안피곤해?”

“피곤하긴 한데 별로 자고싶지 않아. 시간이 조금만 더 느리게 가면 좋겠어.”

“노래 들을래?” 탁자위에 있던 휴대폰을 가져오며 말했다.

“좋아. 너가 아무거나 틀어봐.” Y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 휴대폰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너의 마음이 녹아 우리 밤을 합치면

무너진 달을 세워놓자

가끔 너의 모습은 봄날의 낮과 밤 같아

따스하다가도 차갑곤 해     


“새벽에 딱 어울리는 노래야.” 그녀가 내 품속으로 더 들어오며 말한다.

“가사가 참 낭만적인데 그래서 더 슬퍼.”

“이별노래는 정말 많은데 너가 들려주는 노래들은 하나같이 가사가 너무 좋아. 듣고나면 뭔가 찝찝한게 자꾸 생각나게 해.”

“노래 불러줘.” 그녀의 얼굴에 내 얼굴을 더욱 가까이하며 속삭였다.

“좀 부끄러운데.. 다음에 꼭 불러줄게.”

“너무해.”

“너도 시 아직 안보여줬잖아. 언제 보여줄거야?”

“다음 여행때 그때 보여줄게. 너도 그때는 노래 불러줘야돼. 노래방에서 부르는 거 말고 내 귀에다가 작게 불러줘.”

“알았어.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돼?”

“아니 일어나고 싶을 때 까지 자. 천천히 움직이자.” 침대에 누워 같은 천장을 바라보며 조곤조곤 단어들이 오간다. 그러다 어느새 그녀는 잠에 빠져들었다. 마치 흰색 천사가 내려온 것처럼.     

아침부터 움직였기에 피곤하지만 잠이 쉽게 찾아오지 않아 잠시 밖으로 나왔다. 저 멀리 나무 사이에 있는 바다를 보며 담배를 한 대 태운다. 아침부터 함께한 우리의 첫 여행을 천천히 되새긴다. 맛있는 음식 앞에서의 티 없는 웃음, 흘러나오는 노래를 배경으로 바다를 바라봤던 기억, 그리고 우리가 그곳에서 나눈 대화. Y의 마지막 질문이 자꾸 신경쓰인다. 나는 그녀가 없는 세상에 살아갈 수 있을까? 그녀가 내 곁을 떠난다면 나는 그녀가 가져다준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한숨과 함께 뿌연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다 서서히 사라진다.     

 

[ ]

“Y야 교환학생 준비는 잘 되가? 이제 3달 남은건가?”

“맞아. 벌써 취업했다니... 부럽다 애리야.”

“난 낭만이 넘치는 유럽으로 가는 너가 훨씬 부러워. 취업하면 삭막한 사막이 끝도 없이 펼쳐질텐데..”

“그래도 하고싶었던 일이잖아. 작가면 연예인들도 많이 볼텐데.” 

“밥이나 먹으러 가자. 따뜻한 칼국수 어때?” 애리의 말에 나는 웃으면서 긍정의 표시를 보냈다.     

“그나저나 너 남자친구랑은 잘 만나고 있어? 너네 이제 곧 1주년이잖아.” 

“응 좋아. 지난주에 여행도 다녀왔어. 강릉으로.”

“다컸네 이제. 어때, 좋았어? 오빠의 맛에 아주 푹 빠져버린거야?”

“뭐래. 그냥 재밌었다는 거지. 맛있는 것도 먹고 바다도 보고.” 멋쩍게 웃으면서 대답한다.

“오빠도 곧 졸업하시는거 아니야?”

“졸업요건은 다 채웠는데 방학에 인턴 한다는 거 같더라구. 그러다가 취업되면 바로 졸업할거래.”

“교환학생 가는거는 뭐래? 걱정 안된대?”

“모르겠어. 딱히 별말 없긴 하는데.. 우리가 애들도 아니고 괜찮겠지.”

“조심해라.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야. 오빠가 다른 여자를 만날 것 같지는 않지만..”

“연락도 잘 하고 중간에 여행도 오기로 했어. 수업 늦겠다. 빨리 가자”     


「사랑에는 3요소가 있습니다. 친밀감, 열정, 그리고 헌신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열정은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빠른 속도로 절정을 찍습니다. 우리가 막 사랑을 시작하면 자꾸만 보고싶고, 안고싶고, 뽀뽀하고 싶은 것이 그 감정이죠. 그리고 친밀감은 열정보다는 느리지만 서서히 증가합니다. 열정은 절정을 찍고 나면 점차 식어가지만 친밀감은 그 과정에서도 계속해서 올라갑니다. 점점 내 옆의 연인이 편해지고 함께 나누는 것들이 많아지는 것이 바로 그 원리입니다. 그리고 헌신의 정도는 가장 느리게 올라갑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것들보다 높게 올라가죠. 그리고 가장 높은 수준을 계속 유지합니다. 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말이에요. 그래서 헌신은 연인들의 감정보다 부부들의 감정이라 설명합니다. 부부들이 30년, 40년, 심지어 50년이 넘도록 함께 살아가는 것은 열정은 진작에 많이 식었겠지만 친밀감과 매우 높은 강도의 헌신의 감정 덕분이에요. 함께 살아가면서 나의 것을 내려놓고 상대의 것을 들어주는 헌신의 감정이야말로 사랑의 지속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리고 유대감으로 형성될 수 있는 열정과 친밀감과는 다르게 헌신은 상대방을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에서 출발한 진정한 사랑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입니다. 아주 천천히 증가하는 만큼 높은 수준의 헌신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느낄 수 있는 그런 감정이지요.」     


지난학기부터 듣고 있는 사랑의 심리학 수업에서는 이렇게 가끔 생각할 만한 이야기들을 많이 듣는다. 그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감정인 줄 알았던 사랑에 숨어있는 내용들을 듣다보면 나의 사랑과 J의 사랑은 어떤 수준인지 궁금해진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 세가지 요소들의 정도를 삼각형으로 표현한 것이 이 사랑의 삼각형입니다. 보이는 것처럼 가장 이상적인 사랑이 바로 균형잡힌 형태의 사랑의 삼각형입니다. 열정과 친밀감, 헌신이 비슷하게 커져있는 정삼각형의 모양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밑에 나오는 불균형한 형태의 사랑의 삼각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 열정이 뾰족한 모양의 삼각형을 가지고 있죠. 열정의 감정이 성적인 매력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런 형태가 많이 나타납니다. 물론 열정적인 관계가 반드시 성적인 매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성적인 관계를 가지는 사람에게 항상 열정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시작할 때 성적인 요소들의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헌신과 친밀감이 낮은 상태에서 열정이 강한 사랑을 경험합니다. 그러다 보면 이 뾰족한 열정에 찔려 사랑이 끝나가기도 하죠. 그래서 우리는 식어가는 열정을 높은 친밀감으로 채우고, 서로에게 생기는 강한 헌신의 감정으로 그 사랑을 잘 이어나가야 합니다.」          


< >

오늘도 밤을 새고 학회 발표 준비를 하고 해가 막 떠오르는 새벽에 집에 들어왔다. 몸과 마음은 모든 것을 빼앗긴 만큼 지쳐 힘없이 침대에 눕는다. 물은 한잔 마시려고 손을 뻗는 순간 컵이 넘어지며 물이 바닥에 쏟아진다. 더 이상 움직이고 싶지 않아 그냥 휴대폰을 켜서 Y에게서 온 연락을 확인한다. 어젯밤에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가는 중이라는 연락이 있다. 간단히 답을 하고 유튜브를 킨다.    

 

「11월 3일, 미국 증시가 경기침체의 영향을 받아 크게 하락했습니다. 시장을 이끌어갔던 기술주들이 줄줄이 하락세를 기록함과 동시에 3년만에 최고의 실업률을 기록한 미국 경제에 대한 의구심이 수면위로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유럽의 중국을 향한 기술 견제가 점점 높은 강도로 치닫고 있습니다. 어젯밤 EU는 중국 반도체 기업에 대한 장비 수출을 규제할 것을 발표했습니다. 이에 중국은 강하게 항의하며 대만의 기술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성명을 내놓았습니다.     

 배우 송해인이 남편과 3년만의 결혼생활을 끝으로 이혼을 발표했습니다. 이 부부는 5년간의 공개연애를 하고 지난 2019년 10월에 결혼식을 올렸는데 어제 공식적으로 이혼에 합의했습니다. 이혼 사유는 성격차이라 밝혔습니다.     

 한국 대표팀에 어젯밤 8시에 있었던 중국과의 월드컵 예선에서 2대0으로 승리하였습니다. 유럽파 선수들의 좋은 활약과 국내 유망주들의 득점으로 많은 우려를 뒤로한채 당당하게 본선 진출행 티켓을 따내었습니다. 이미 진출이 확정된 대표팀은 15일 7시에 호주와의 예선전을 마지막으로 치를 예정입니다.」 

    

천천히 영상들을 내리다 눈에 띠는 제목을 발견했다. 


「사랑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헌신이 중요합니다. 쉽게 달아오르는 열정과 친밀감과 다르게 사랑은 가장 느리게 절정을 찍고 오랫동안 변치않는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소중한 감정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헌신이 강해지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해 관계를 정리합니다. 그러나 헌신이 절대적인 사랑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에 따라서 헌신만 가득한 사랑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작년기준 대한민국의 이혼율을 50%에 달합니다. 매년 결혼하는 커플의 절반 숫자가 이혼하고 있다는 말인데요, 그들에게 모두 헌신이 없었을까요?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진 부부들도 이혼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외도, 고부갈등과 같이 다양한 외적 요인들이 존재하겠지만 그들이 헤어짐을 택한 이유가 헌신 일 수도 있습니다. 열정과 친밀감이 없이 헌신만 가득한 사랑을 반기지 않는 젊은 세대들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함께 평생을 살아가는 것은 상대방을 위하는 감정 뿐만 아니라 보고싶고, 함께하고 싶고, 만지고 싶은 감정들이 수반되야 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좋은 사랑의 관계를 위해서는 내 감정을 표현하고, 상대방의 감정을 함께 느끼며 열정과 친밀감이 식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열정은 시간이 지남에따라 점점 식어가겠지만 친밀감을 통해 사랑에 당위성을 부여해야 합니다.」     


가슴이 이유모르게 먹먹해진다. 내가 하는 사랑은 어떤 단계의 사랑일까. 우리 사이에는 아직 열정과 친밀감이 많이 남아있는 것인가? 나는 Y를 사랑한다. 지금처럼 혼자 누워있으면 내 침대에 그녀가 같은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함께하는 것들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서로 정서적 지지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나보다 그녀가 내 인생의 우선순위가 되었다는 것은 명확하다. 그렇지만 이 감정들이 언제까지나 우리를 지켜줄 수 있을까? 언젠가 우리 사이에 다른 감정들이 남아있지 않는 순간이 온다면 우리는 그때 헤어지는 것인가. 그 순간이 꼭 찾아와야만 한다면 최대한 뒤로 미루고 싶다. 내 기억속에 무언가를 처음 하는 순간들에는 Y가 그 곁에 있는 것들이 점점 많아진다. 나는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 높은 곳에서 한순간에 떨어져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온다. 내 사랑이 변치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그녀의 사랑 또한 나만을 향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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