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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불안하고 종종 명랑한

by 이찬란




아무 이유 없이 축축 처지는 날들이 이어졌다. 나는 늘 하던 대로 느지막이 일어나 씻고, 토스트와 커피로 식사를 하고, 느릿느릿 돌아다니며 청소기를 돌린 뒤, 뉴스를 틀어놓고 역시 느리고 성의 없게 화장을 하고나선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거나 딴생각을 하다가 출근한다. 출근해선 몇 시간 정신없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빈 교실을 청소하고 돌아와 저녁을 먹는다. 그 모든 일은 눈감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하고 편안한 나의 일상이다. 한동안 낮밤이 바뀐 채로 생활하다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그 안락함이 고마워서 눈물을 쏟을 뻔했다.

첫 한 주 간은 내게 주어진 자유시간을 매우 의욕적으로 소비했다. 여행을 다녀오고 초저녁부터 끊기지 않는 잠을 자고, 와인을 홀짝이며 넷플릭스 시리즈를 정주행하고, 오랜만에 매트를 펼치고 굳은 팔과 다리를 필라테스로 쭉쭉 늘리고 반신욕을 했다. 그러나...고마움도 잠시, 어느새 숨어있던 나쁜 습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되찾은 일상에 대한 기쁨은 옅어지고 의욕도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이렇게 아무 일 없어도 괜찮은 거야, 싶어서 뭐라도 해보려고 마음먹었다가도 막상 움직이려면 ‘그래서 이걸 해서 뭘 어쩌자는 거지?’하고 의미를 따져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높은 확률로 게으름이 원인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나쁜 습관’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변명하듯 게으름의 속살을 파고들면 보이는 것이 있다. 바로 불안이다. 너무 깊숙이 숨어있어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한순간도 불안하지 않은 채로 있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어릴 적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내던 불안은 이제 아주 교묘하고 노련하게 일상을 흔든다. 그건 뭐랄까 멀리서 일어난 지진의 미세한 여파 위에 서 있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당장 발밑이 꺼질 만큼 위협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뭔가를 새로 쌓기는 망설여지는……. 그래서인지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내게 의미 있는 일을 할 때 불안은 더 커진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책을 펼쳤다가 이내 덮어버리고, 써 놓은 소설을 고치려고 노트북을 켰다가도 곧 집중력을 잃고 카톡창을 열어 새 메시지를 확인하다가 한숨을 쉬며 성인 ADHD같은 단어를 검색한다.

-지금 연습하지 않으면 연속 학습의 불씨가 꺼져요!

휴대폰에 깔아둔 듀오링고 앱에서 독촉 알림이 온다.

-포기 직전 당신을 구원할 최.소,한의 운동 효과 루틴 모음!

온라인 운동 앱에서도 나를 구원하기 위해 신호를 보낸다. 자잘한 죄책감이 모래알처럼 발밑에 자글자글 쌓인다. 그럴수록 불안함에 쫓긴 나는 이것도 저것도 손에 쥐지 못하고 더욱 느려지기만 한다. 의미 없는 SNS서칭 시간이 늘어나고 그에 비례해 수면의 질도 나빠진다.


“아주 행복에 겨워 똥을 싼다!”

엄마라면 이렇게 일침을 놓았을 것이다.

맞다, 거둬 먹일 남편도 자식도 없이 내 몸 하나만 건사하면 되는 나는 행복에 겨워 똥을 싸는 중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나란 인간이 이렇게 나약한 것을...

어느 밤, 그런 생각으로 또 복잡해진 채 침대에 웅크리고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침대 안이 너무 썰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침대를 창 바로 아래 길게 붙여놓은 탓에 전날도, 그 전날도 계속 추웠다. 우씨, 이렇게 추운데 왜 계속 참고 있었던 거야! 전기매트를 켜도 발끝이 차가워 이불을 돌돌 말고 자던 나를 생각하니 불쑥 화가 나면서 전투력이 상승했다. 시간은 이미 밤 열 시를 지나고 있었다.

그래도 못 참아!

결국 그 밤중에 침대를 끌어당기고, 화장대를 옮기고 콘센트와 연결된 전자 기기들을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밤이라 시끄럽지 않게 신경 쓰느라 시간이 두 배로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쓸고 닦고, 움직이기를 다 끝내고 더러워진 잠옷까지 훌렁 벗어제치고 나니 한결 상쾌해졌다. 침대에 누워보았다. 찬바람이 숭숭 들어오던 이불 안이 포근했다.


‘내가 게을러졌던 건 침대 때문이었어. 추우니까 웅크리게 되고, 일어나기 싫어지고, 그러니까 할 일도 제대로 못 하게 된 거라고.’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곤 이참에 편안하게 앉아 책 읽을 공간도 만들기로 했다. 불편하고 딱딱한 의자 대신 책장 앞에 놓을 빈백을 주문했다. 찻잔을 올려둘 귀엽고 환한 색상의 사이드 테이블과 보들보들한 재질의 담요도 열심히 검색해 주문을 마쳤다. 열두 시가 넘은 오밤중에 그 모든 일을 마치고 흡족한 피로감에 휩싸여 잠들었다.


우리나라의 빠른 배송 시스템 덕에 물건들은 하루, 이틀 만에 속속 도착했고 익숙하고 지루하던 집이 조금 낯설고 환하게 변했다. 한가한 일요일, 크림색 빈백에 몸을 파묻고 앉아 일주일째 같은 페이지에 연필이 끼워져있던 책을 펼쳤다.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읽은 페이지가 늘어날수록 발밑을 은근히 흔들던 불안이 스르르 모습을 감추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이게 나지. 이런 게 나야! 너 어디 갔다 이제 왔니!”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듣는 사람도 없는 집에서 나는 명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곤 혼자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있는 게 재밌고 우스워 더욱 즐거워졌다. 그렇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때 이른 캐럴을 틀고 커피머신에 좋아하는 캡슐을 골라 넣으며 둠칫둠칫 어깨를 들썩였다.

다소 불안하고 종종 명랑한 나는 습관처럼 이런 짓을 되풀이한다. 때때로 조증환자 같긴 하지만 게으름도 불안도 떠나보낼 수 없으면 뭐...이렇게 사는 수밖에.

딱히 나쁠 것도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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