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08
대만은 중국과는 전혀 달라요.
오히려 일본에 가깝죠.
타이베이에서 오랫동안 거주해왔다는 통역사가 내게 넌지시 건넨 말 한마디. 그 찰나의 문장 덕분에 대만 바이어들과 미팅을 하며 느꼈던 그 미묘한 거리감의 실체가 단번에 이해됐다. 대만은 직접 발을 들이기 전까지 내 멋대로, 그리고 막연하게 상상해오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얼굴을 지닌 나라였다.
2018년 1월, 우리는 경기콘텐츠진흥원이 마련한 공동관의 일원으로 ‘대만 게임쇼(TGS) 2018’에 참가했다. 그곳에서의 경험은 내 무의식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던 태도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돌아보게 만든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섣불리 짐작하거나 결론 내리기보다 한 템포 멈춰 서서 팩트를 체크하고 신중하게 전략을 세우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대화 도중 습관처럼 내뱉던 “내 생각에는”, “내가 볼 때”라는 말도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비즈니스든 사회 현상이든, 본질을 제대로 꿰뚫지 못한 채 내 기준만으로 성급히 판단하던 과거의 습관이 대만이라는 낯선 거울을 통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1월은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기였다. 삼성전자와 진행 중인 프로젝트 마감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긴박한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대만 출장 일정까지 겹쳐버렸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상황은 지난 도쿄 게임쇼에서 내가 엉겁결에 내뱉은 약속에서 비롯된 일이었으니까.
도쿄에서 돌아온 직후, 나는 진흥원 홈페이지에 올라온 대만 게임쇼 참가 기업 모집 공고를 발견했다. 앞으로 들이닥칠 빡빡한 일정은 미처 계산에 넣지도 못한 채, ‘지난번에 매니저님과 약속했으니 신청이라도 해두자’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지원서를 던졌다. 그리고 뜻밖에도—어쩌면 당연하게도—우리는 당당히 참가 기업으로 선정되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지극히 예정된 결과였다. 당시 개발 중이던 ‘버추얼 닌자’는 경기도의 제작 지원을 받아 탄생한 콘텐츠였고, 이를 다시 경기도가 지원하는 해외 게임쇼에 출품해 판로를 모색하겠다는 시나리오는 공공기관 입장에서 거절하기 힘든, 아주 ‘개연성 높은’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제는 앞만 보고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대만이라는 나라에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업계 종사자로서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당시 VR 하드웨어 시장은 미국의 오큘러스(현 메타)와 대만의 HTC 바이브가 양분하여 치열하게 경쟁하던 시절이었고, 국내 콘텐츠 제작사들은 기기 수급이 용이한 쪽에 맞춰 양사의 제품을 두루 활용하고 있었다.
우리 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HTC의 홈그라운드인 대만은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시장이었다. 이미 글로벌 기업인 S전자와 협업 중이었으니, 만약 HTC와도 인연을 맺을 수만 있다면 외주 업계에서 우리 팀의 ‘이름값’은 그야말로 하늘을 뚫고 치솟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꽤 설렜다.
기왕 가는 김에 HTC 담당자를 직접 공략해 보기로 결심했다. 대화의 물꼬를 잘 터서 따로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며, 중화권 특유의 ‘꽌시(關係)’를 만들어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유대감을 기반으로 서로 이익을 주고받는 이 독특한 관계 문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보고 싶었다. ‘대만도 어차피 중화권이니 중국이랑 비슷하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짐을 꾸렸다.
24일 오후, 타오위안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국광버스를 타고 타이베이의 랜드마크 ‘타이베이 101’로 향했다. 대만 게임쇼가 열리는 장소가 101 빌딩 바로 옆에 위치한 세계무역센터(TWTC)였기 때문이다. 보통 기관이 지원하는 전시회는 개막 하루 전날, 설치된 공동관을 미리 점검하는 시간을 갖는다. 통상 10분 내외면 끝나는 간단한 확인 작업이지만, 시연 공간의 컨디션이나 전력 상태 등 혹시 모를 돌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 절차였다.
부스 상태를 꼼꼼히 체크한 뒤, 우리는 걸어서 숙소로 이동해 짐을 풀었다. 숙소는 타이베이 101 맞은편 거주 지구에 자리한 오래된 아파트로, 에어비앤비를 통해 예약한 곳이었다. 노트북과 VR 기기 등 챙겨야 할 장비가 워낙 많았던 터라, 매일의 출퇴근 동선을 고려하면 먼 거리의 호텔보다는 전시장 근처인 이곳이 훨씬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짐을 대충 던져두고 가벼운 차림으로 나선 우리는 곧장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대만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는 스린 야시장(Shilin Night Market)이었다.
대만은 야시장 문화가 그 어느 곳보다 활발한 나라다. 해가 지면 도시 곳곳에 노점들이 줄지어 들어서고, 퇴근길의 현지인과 들뜬 관광객들이 한데 뒤섞여 먹고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중에서도 타이베이의 스린 야시장은 규모나 유명세 면에서 단연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곳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그 활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어깨가 부딪힐 만큼 좁은 골목을 가득 메운 인파, 그리고 사방에서 풍겨오는 낯설고 강렬한 음식 냄새들. 우리는 우선 대만의 국민 간식인 ‘지파이’와 ‘치즈 감자’를 손에 들고, 허기를 달래며 지하 푸드코트로 향하는 길을 찾아 나섰다. 워낙 구역이 넓고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 있어, 입구 하나를 찾는 데도 한참을 헤매야 했다.
한참을 돌고 돈 끝에 드디어 ‘미식구(美食區)’라 적힌 지하 푸드코트 입구에 다다랐다. 활기 넘치는 가게 중 한 곳에 자리를 잡고, 대만의 대표 별미인 굴전(蚵仔煎)을 주문했다. 여기에 대만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딱 18일 동안만 유통되는 신선한 ‘18일 맥주’를 곁들였다. 시원한 맥주 한 잔에 굴전 한 점을 나누며, 우리는 다시 한번 이번 출장의 목표를 되새겼다.
“자, 내일부터 대만 ‘꽌시’ 한번 제대로 만들어 봅시다!”
다음편, '대만 타이베이 : 꽌시 대신 미래시 2' 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이번 주는 매일(월~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