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들을 꽉 진 손을 스쳐 안개의 호흡이 느껴졌다. 안개에 휩싸인 도로가 몽환적으로 느껴졌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세상의 가닥이 흐릿하게 번져갔다. 엔진 소리가 낮고 부드럽게 울리며 새로 깔린 아스팔트를 지나가고 있지만, 아침의 고요를 깨는 동시에 더욱더 그 고요함을 자극하는 것만 같았다. 도로 양옆으로 식재된 가로수가 여기가 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이정표 역할을 하는 듯했다. 그 나무가 먼 곳에서 되려 나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나무의 그림자가 된 것 같은 느낌 속에, 조수석 시트에 올려놓은 한 뭉치의 원고에 잠시 눈길이 닿았다.
2년 전, 썼던 단편 소설, 그리고 귀촌하고 차분하게 작업했던 여타의 단편 소설을 올해 책으로 출간하려고 계획했다. 영산강의 길에서 건져 올린 다양한 삶을 시각으로, 후각으로 담으려고 했다. 막상 원고를 묶어 놓고 보니, 점점 자신감이 없어졌다. 차창을 살짝 열었다. 길게 뻗은 길에 무늬를 남기듯 안개의 결이 얼굴을 차갑게 감쌌다. 상쾌하면서도 서늘했다. 폐 깊숙이 짙은 습기가 몰려왔다. 간혹 흙이 갈린 냄새가 코 밑을 간질 었다.
목포의 온금동에 카메라 하나 달랑 들고 답사를 하던 날, 여름날의 무더위는 내 턱끝에서부터 흘렀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며, 멧비둘기를 보고, 마을의 집에 마루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들의 건축구조가 온금동 다순구미 사람들의 삶과 닮았다는 영감을 받았다. 조선내화의 노후 담벼락에 땅거미가 질 때까지 오가며,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어깨가 굽은 아주머니들이 그물을 수선했던 곳이었다. 지나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한 장면인 듯 멀게만 느껴졌다. 재개발이 한창 진행 중인 동네에 걸린 현수막에는 ‘세입자 임대 아파트 및 주거 이전비 신청 접수’라는 글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그 글씨 사이에서 나는 바다 냄새를 맡았다. 그 옛날 바다에만 섰다는 장, 파시가 떠오르는 것은 해풍에서도 삶을 개척했던 ‘조금새끼’에 대한 마을 이야기가 있어 가능했다.
안개에 갇혀 차선이 흐릿하게나마 그 존재를 드러내며 내 앞길을 밝혀주듯, 마을의 이야기는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마을의 삶에 대해, ‘고향’이라는 두 음절이 어색하지 않게 말해주는 듯했다. 내가 사는 지역과 한 시간여 거리에 있는 유달산에 물길을 잇는 이야기 속에서 노닐고 싶다는 욕심은 철없는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작품 활동을 하는 동안, 코로나의 날카로운 칼날 앞에 숨을 죽였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 틈에 태어난 두 아들의 얼굴을 면밀히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순구미 전봇대에 붙여진 빈방 ‘있슴’이라는 글자와 현대의 표준어 정책에 따라 ‘있음’으로 변모한 사이의 내력을 읽자는 계획이 세워졌고, 실제 작품을 집필하는 기간은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다시, 학교로 가는 길, 공강 시간에 틈틈이 퇴고를 하고 있다. 몇 년 묵은 작품이 새롭게 보이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다.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안개가 낀 도로처럼 이것도 내 삶의 무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오전이 끝날 무렵이면 그 윤곽마저 사라지겠지만, 삶을 온전히 포개고 싶은 마음이 이전과 이후에도 남아 있다면, 나는 이 고요한 무늬를 내 몸에 새기기로 다짐했다. 그 속에서 지역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와 역할을 조율해보고 싶다. 그때에야 비로소 나의 영혼이 안갯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올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