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덫을 놓은 그녀

by 책방별곡

처음엔 그저 조용히 책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집을 벗어나기가 어려운 집순이에서 변화를 주고 싶어 맘카페에서 독서모임을 찾았다. 좋아하는 책을 읽고 그 감상을 나누며 사람 냄새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작은 바람이었다. 하지만 모임을 시작하고 6개월이 지났을 무렵 세상이 멈춰버렸다. 코로나가 시작되었다. 다들 하나둘 발길을 끊었고 모임은 서서히 식어갔다.

온전히 나로 돌아가는 시간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온라인으로라도 계속 이어가자며 새 멤버를 모집했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H였다. 톡방에서부터 눈에 띄던 그녀는 말투가 솔직했고 표현이 재미있었다. 무겁지 않은 농담을 던지면서도 본질을 찌르는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H에 대한 호기심으로 용기를 내어 카페에서 따로 만나자고 했다.

여름의 열기가 사라지는 저녁시간이었다. 한 시간쯤 대화를 나누었을까. 커피는 식었고 나는 그녀의 이야기에 빠졌다. 가족 이야기, 일 이야기, 독서의 어려움까지 대화가 한참 무르익을 즈음 H가 불쑥 말했다.
“사실 저 주말마다 공부를 하고 있어요.”

순간 무슨 공부인지 몰라
"공무원 시험 준비해요?" 하고 되물었다.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업을 풀어주는 공부요. 사람들은 사이비라 그러는데 그건 오해예요."

그때부터 그녀의 말은 마치 잘 짜인 대본처럼 이어졌다. 이순신 장군의 후손들이 잘 못 사는 이유는 그가 전쟁에서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고 그 업보가 후손에게 전해졌단다. 내가 원하는 대학에 못 가서 방황하고 고시에 연거푸 낙방도 조상의 업 때문이란다. 그 한을 달래야 인생이 풀린다며 자기 역시 과거에는 힘들었는데 지금은 참 편해졌다고 내 눈을 꿰뚫듯이 쳐다봤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커피 향은 사라지고 소름 돋는 사이비의 냄새가 공간을 채웠다.
"아… 그래요..”
뚝딱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자 그녀는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로 말했다.
"괜찮아요. 처음엔 다 그렇게 당황하거든요."

그 미소가 서늘했다.
화장실에 가는 척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집에 급한 일 있다고 나한테 전화하고 지금 빨리 데리러 와."
이십 분은 더 그 헛소리를 듣고는 거의 도망치듯 카페를 빠져나왔다.

모임에서 오래된 멤버들에게 H의 실체를 말했지만 나를 어디로 끌고 가진 않았으니 일단 지켜보자고 결론이 났다. 하지만 그것은 인생을 살아가며 저지른 큰 실수 중 하나였다. H가 모임 멤버 중 한 명을 골라서 또 도를 전파하려 했다. 결국 그녀는 모임에서 쫓겨났다.

그 일을 겪고 나서 한동안은 새로운 사람의 미소를 마주하는 게 힘들었다. 따뜻한 위로인 줄 알았던 말이 실은 정교하게 설계된 덫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유난히 맑게 웃던 H의 얼굴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 웃음 뒤에 드리워져 있던 검은 그림자. 그녀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외로움을 파고들며 자신만의 '도'를 전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것이 구원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칼날인 줄도 모른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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